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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서 답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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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담 정안

금강경에서 수보리의 삼약삼보리심을 발한 이는 응당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합니까?(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응당히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으라.(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라고 설하신다.
이 질문과 답을 놓고 금강경을 관(觀)하면 질문과 답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경을 독송하는 가운데 부처님 말씀으로 그 답을 찾아보면 아욕다라삼약삼보리심을 발한 이는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고(應無所住 而生其心) 모든 유위법( 一切有爲法)은 꿈이며, 환상이며, 거품이며, 그림자 이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것으로 관(觀)하여 그 마음을 항복 받으라는 것이다.

육조 혜능스님은 금강경 서문에 금강경은 무상(無相)으로 종(宗)을 삼고 무주(無住)로 체(體)를 삼으며 묘유(妙有)로 용(用)을 삼는다고 했다. 즉 육조스님이 금강경에서 근본을 삼고자 하는 것은 무상(無相)이며, 확실한 체로 삼는 것은 무주(無住)이며, 다양하게 쓰고자하는 것은 묘유(妙有)이다.

무상(無相)이란 형태나 형상으로 사물이나 현상의 일정함이 있으면 상(相)이 있다고 하고. 현상의 형태나 일정한 현상이 없는 것을 무상(無相)이라 하나 여기에서의 무상(無相)이란 마음으로 현상의 형태나 일정한 현상을 들어 기준을 삼는 것을 금한다는 이야기 이다.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머물게 하여 마음을 내야 하는지는 진리를 찾는 수행자들의 공통된 의문일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수행의 방법뿐만 아니라 존엄의 모습까지도 일정한 형태나 형상(凡所有相 皆是虛妄)을 마음에 두지 말라(不取於相 如如不動)고 한다.
무주(無住)란 마음을 어떻게 어디에 머물게 할 것이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면 응당히 머무는 곳 없이 마음을 내라고(應無所住 而生其心) 했다. 그러면서 마음이 머무는 곳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색에도 머물지 말고(不應住色生心)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고 했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부처님을 존경 공경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즉 부처님을 찾고자 할 때는 모습이나 소리로 찾을 것 같으면 이는 삿된 행동으로 부처님을 찾지 못할(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것이다. 라고 했다.

묘유(妙有)는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존재하는 모습은 묘유(妙有)이다. 묘유(妙有)를 여러 방법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즉 존재하는 모습에는 각자 다른 존재의 가치와 값이 어떤 묘유(妙有)로 존재하게 해줄 것이냐 하는 것이 궁금한 문제이다.
존재하거나 존재하게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에 따라 묘유(妙有)가 된다. 묘유(妙有)란 언어적 수식이나 표현적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계가 없이 존재하는 묘유(妙有)는 쓰는 사람의 몫일 것이다.

금강경에서 근본(宗)이 되는 무상(無相)은 화가가 그리고자하는 그림일 것이고 그 그림에 집착으로 머물지 않으면 존재의 가치는 형언할 수 없는 묘유(妙有)로 남게 된다.
조회수 : 13 , 추천 : 0 , 작성일 : 2018-04-12 , IP : 220.79.22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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