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의 법문,  뜻 깊은 좋은 말씀  깨침의 소리...

반야는 창조와 행복의 어머니 (청화 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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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는 창조와 행복의 어머니-
-부처님 가르침은 만병 통치약-
.
만법은 유식이라 모든 존재가 오직 식(識) 곧,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동물도 유정(有情)·무정(無情)도 모두가 오직 식(識) 곧 마음입니다. 식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만법유식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역시 식(識) 덩어리요, 마음 덩어리요, 산도 태양도 별도 식 덩어리요, 우리 지구도 바로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는 바로 그대로 지장보살 입니다. 또는 태양은 바로 그대로 관세음보살이요, 달은 대세지보살 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도리인 반야바라밀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여태 반야에 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도 하고 검토해 왔습니다.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 도리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고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현상계는 사실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비어 있어서 허무한 것이나, 모든 허망한 존재의 근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한 공덕을 갖추고 우주에 충만해 있는 바로 생명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실상(實相)의 도리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가 있으면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됩니다. 반야는 어느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전도된 몽상만 여의어 버리면 바로 반야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또는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또는 어떤 행동이나 때묻은 유루행(有漏行) 밖에는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이 보고 느끼는 일체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며, 범부인 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전도된 몽상입니다. 전도된 몽상을 끊어 버리지 않고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이런 수도의 방편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며, 관법(觀法)이요, 주문(呪文)이며 계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아직 반야의 도리를 증명은 못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바른 이해가 있어야 수행이 바로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인 자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俉後修)(먼저 깨치고 뒤에 수행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相)을 여의면서 체(體)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조(思潮)는 여러 갈래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하나의 도리, 하나의 근본 체성(體性)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 포괄적인 본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相)에서 체(體)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를 맞이하여 불교도 내 종파 네 종파의 편견에서 벗어나 불법의 근본이자 우주의 법칙인 반야바라밀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한 때 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러가지 방편이 있는 것인데 우주 자체가 무량무변한 진여불성이므로 불성을 깨닫는 대도(大道)에는 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무엇이 조주입니까’하고 법을 물으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라’ 진실한 조주는 어느 한 문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참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위대한 길이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마음만 사무치면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수도정진하는 과정에서 물(水) 보고 깨닫고 불(火)보고 깨닫고 달(月)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체(體)를 여의지 않고 용(用)을 나투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수행자의 자세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닫고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도 모두가 체에서 용으로 화현(化現)되었다가 다시 체로 돌아갑니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입니다. 현상적인 용(用)이란 본래 본체에 입각해서 용(用)을 나투어야 온전한 바른 통찰과 올바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본체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을 여윈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무소유의 경계는 일체만유 그대로 진여법성의 경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미망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자리에다 우리의 마음을 둔다면 우리의 행위인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청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도덕률입니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우주의 도리요,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리는 본래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말하는 언어나, 행동하는 몸짓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 곧 우주의 천연자연(天然自然)한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도 인간성의 실존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제가 가장 절실한 근본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깨닫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는 인간성을 개발하는선구자 입니다. 현대사회의 선구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칠전팔기로 즉시 다시 일어나서 나약한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땅에 넘어지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바로 일어나서 한사코 법성(法性)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붙이고 미망의 그물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 스승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나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이와 같이 생명의 고향인 본체로 돌아가는 그 행위가 가장 수승한 행위요, 가장 진정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된 몽상만 떠나면 모든 것이 한결같이 제법(諸法)이 공(空)이요 5온(五蘊)이 개공(皆空)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고 여러 가지 번뇌가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참구하는 공덕보다 더 수승한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영양분을 많이 섭취합니다만 그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훌륭한 영양분, 가장 완벽한 보약은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에다가 마음을 두고 바로 생활한다면 웬만한 문제들은 풀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가까울 수록 더 잘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무슨 병이나 다 근본은 무명에서 오는 것이며 법성 자리에는 본래 죽음도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안 먹어도 단백질을 별도로 안 취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약해서 뒤뚱거리고 넘어지기가 쉽지만 넘어지면 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길은 공명정대한 우주의 공정한 길입니다. 사실은 최상의 안락행(安樂行)입니다. 수행자들이 가는 길은 수 많은 성현(聖賢)들이 헤치고 다져놓은 탄탄하고 활짝 트인 해탈의 대도입니다.

전도된 몽상만 떠나 버리면 훤히 트인 마음으로 영생(永生)의 낙토(樂土)를 지향하여 환희용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눈도 열려 버리면 웬만한 병은 침범을 못합니다. 그래서 한없이 틔어 있고 다만 비어 있지 않는 자리, 무량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 이 자리를 생각하고 그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는 생활보다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불경에도 아가타약을 말합니다. 아가타약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부처님 명호나 화두나, 또는 주문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법은 다 한결같이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의 아가타약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요 일체의 존재가 바로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또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 호념(護念)하는 것입니다. 다같은 부처이므로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상통하고 감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자기 문중(門中)에 집착하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것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어두워지고 그지없이 옹색해 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틔어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없는 마음인 것을 구태여 지어서 ‘나’에 집착하고 법에 집착한다면 공부나 다른 사람한테나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되며 그것이 또한 우주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아무렇게나 방만(放漫)하게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에 대한 집착을 털고 나에 대한 집착을 털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해탈을 지향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번뇌 해탈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첨단 과학에도 뒤지지 않고 우리가 5욕의 수렁에서 헤매는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진정한 보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과거 전생에 두고두고 공덕을 쌓아서 금생에 영광스러운 법의를 입었습니다. 우리들의 무상(無常)한 금생 인연이 몇 차례나 다시 만나게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내생에 가서도 꼭 우리는 수행자가 되어서 피차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몇 만 생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사코 중생 제도를 위해서 반드시 고통 많은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때마다 출가하여 성취하고 본래 없는 무명 다 여의고, 본래 없는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게 할 것입니다.


< < 글 시작으로 .
만법은 유식이라 모든 존재가 오직 식(識) 곧,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동물도 유정(有情)·무정(無情)도 모두가 오직 식(識) 곧 마음입니다. 식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만법유식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역시 식(識) 덩어리요, 마음 덩어리요, 산도 태양도 별도 식 덩어리요, 우리 지구도 바로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는 바로 그대로 지장보살 입니다. 또는 태양은 바로 그대로 관세음보살이요, 달은 대세지보살 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도리인 반야바라밀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여태 반야에 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도 하고 검토해 왔습니다.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 도리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고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현상계는 사실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비어 있어서 허무한 것이나, 모든 허망한 존재의 근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한 공덕을 갖추고 우주에 충만해 있는 바로 생명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실상(實相)의 도리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가 있으면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됩니다. 반야는 어느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전도된 몽상만 여의어 버리면 바로 반야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또는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또는 어떤 행동이나 때묻은 유루행(有漏行) 밖에는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이 보고 느끼는 일체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며, 범부인 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전도된 몽상입니다. 전도된 몽상을 끊어 버리지 않고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이런 수도의 방편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며, 관법(觀法)이요, 주문(呪文)이며 계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아직 반야의 도리를 증명은 못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바른 이해가 있어야 수행이 바로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인 자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俉後修)(먼저 깨치고 뒤에 수행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相)을 여의면서 체(體)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조(思潮)는 여러 갈래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하나의 도리, 하나의 근본 체성(體性)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 포괄적인 본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相)에서 체(體)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를 맞이하여 불교도 내 종파 네 종파의 편견에서 벗어나 불법의 근본이자 우주의 법칙인 반야바라밀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한 때 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러가지 방편이 있는 것인데 우주 자체가 무량무변한 진여불성이므로 불성을 깨닫는 대도(大道)에는 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무엇이 조주입니까’하고 법을 물으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라’ 진실한 조주는 어느 한 문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참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위대한 길이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마음만 사무치면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수도정진하는 과정에서 물(水) 보고 깨닫고 불(火)보고 깨닫고 달(月)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체(體)를 여의지 않고 용(用)을 나투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수행자의 자세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닫고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도 모두가 체에서 용으로 화현(化現)되었다가 다시 체로 돌아갑니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입니다. 현상적인 용(用)이란 본래 본체에 입각해서 용(用)을 나투어야 온전한 바른 통찰과 올바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본체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을 여윈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무소유의 경계는 일체만유 그대로 진여법성의 경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미망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자리에다 우리의 마음을 둔다면 우리의 행위인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청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도덕률입니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우주의 도리요,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리는 본래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말하는 언어나, 행동하는 몸짓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 곧 우주의 천연자연(天然自然)한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도 인간성의 실존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제가 가장 절실한 근본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깨닫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는 인간성을 개발하는선구자 입니다. 현대사회의 선구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칠전팔기로 즉시 다시 일어나서 나약한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땅에 넘어지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바로 일어나서 한사코 법성(法性)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붙이고 미망의 그물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 스승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나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이와 같이 생명의 고향인 본체로 돌아가는 그 행위가 가장 수승한 행위요, 가장 진정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된 몽상만 떠나면 모든 것이 한결같이 제법(諸法)이 공(空)이요 5온(五蘊)이 개공(皆空)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고 여러 가지 번뇌가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참구하는 공덕보다 더 수승한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영양분을 많이 섭취합니다만 그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훌륭한 영양분, 가장 완벽한 보약은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에다가 마음을 두고 바로 생활한다면 웬만한 문제들은 풀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가까울 수록 더 잘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무슨 병이나 다 근본은 무명에서 오는 것이며 법성 자리에는 본래 죽음도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안 먹어도 단백질을 별도로 안 취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약해서 뒤뚱거리고 넘어지기가 쉽지만 넘어지면 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길은 공명정대한 우주의 공정한 길입니다. 사실은 최상의 안락행(安樂行)입니다. 수행자들이 가는 길은 수 많은 성현(聖賢)들이 헤치고 다져놓은 탄탄하고 활짝 트인 해탈의 대도입니다.

전도된 몽상만 떠나 버리면 훤히 트인 마음으로 영생(永生)의 낙토(樂土)를 지향하여 환희용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눈도 열려 버리면 웬만한 병은 침범을 못합니다. 그래서 한없이 틔어 있고 다만 비어 있지 않는 자리, 무량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 이 자리를 생각하고 그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는 생활보다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불경에도 아가타약을 말합니다. 아가타약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부처님 명호나 화두나, 또는 주문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법은 다 한결같이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의 아가타약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요 일체의 존재가 바로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또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 호념(護念)하는 것입니다. 다같은 부처이므로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상통하고 감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자기 문중(門中)에 집착하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것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어두워지고 그지없이 옹색해 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틔어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없는 마음인 것을 구태여 지어서 ‘나’에 집착하고 법에 집착한다면 공부나 다른 사람한테나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되며 그것이 또한 우주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아무렇게나 방만(放漫)하게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에 대한 집착을 털고 나에 대한 집착을 털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해탈을 지향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번뇌 해탈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첨단 과학에도 뒤지지 않고 우리가 5욕의 수렁에서 헤매는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진정한 보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과거 전생에 두고두고 공덕을 쌓아서 금생에 영광스러운 법의를 입었습니다. 우리들의 무상(無常)한 금생 인연이 몇 차례나 다시 만나게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내생에 가서도 꼭 우리는 수행자가 되어서 피차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몇 만 생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사코 중생 제도를 위해서 반드시 고통 많은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때마다 출가하여 성취하고 본래 없는 무명 다 여의고, 본래 없는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게 할 것입니다. .
만법은 유식이라 모든 존재가 오직 식(識) 곧,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동물도 유정(有情)·무정(無情)도 모두가 오직 식(識) 곧 마음입니다. 식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만법유식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역시 식(識) 덩어리요, 마음 덩어리요, 산도 태양도 별도 식 덩어리요, 우리 지구도 바로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는 바로 그대로 지장보살 입니다. 또는 태양은 바로 그대로 관세음보살이요, 달은 대세지보살 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도리인 반야바라밀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여태 반야에 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도 하고 검토해 왔습니다.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 도리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고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현상계는 사실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비어 있어서 허무한 것이나, 모든 허망한 존재의 근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한 공덕을 갖추고 우주에 충만해 있는 바로 생명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실상(實相)의 도리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가 있으면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됩니다. 반야는 어느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전도된 몽상만 여의어 버리면 바로 반야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또는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또는 어떤 행동이나 때묻은 유루행(有漏行) 밖에는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이 보고 느끼는 일체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며, 범부인 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전도된 몽상입니다. 전도된 몽상을 끊어 버리지 않고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이런 수도의 방편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며, 관법(觀法)이요, 주문(呪文)이며 계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아직 반야의 도리를 증명은 못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바른 이해가 있어야 수행이 바로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인 자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俉後修)(먼저 깨치고 뒤에 수행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相)을 여의면서 체(體)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조(思潮)는 여러 갈래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하나의 도리, 하나의 근본 체성(體性)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 포괄적인 본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相)에서 체(體)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를 맞이하여 불교도 내 종파 네 종파의 편견에서 벗어나 불법의 근본이자 우주의 법칙인 반야바라밀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한 때 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러가지 방편이 있는 것인데 우주 자체가 무량무변한 진여불성이므로 불성을 깨닫는 대도(大道)에는 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무엇이 조주입니까’하고 법을 물으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라’ 진실한 조주는 어느 한 문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참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위대한 길이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마음만 사무치면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수도정진하는 과정에서 물(水) 보고 깨닫고 불(火)보고 깨닫고 달(月)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체(體)를 여의지 않고 용(用)을 나투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수행자의 자세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닫고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도 모두가 체에서 용으로 화현(化現)되었다가 다시 체로 돌아갑니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입니다. 현상적인 용(用)이란 본래 본체에 입각해서 용(用)을 나투어야 온전한 바른 통찰과 올바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본체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을 여윈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무소유의 경계는 일체만유 그대로 진여법성의 경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미망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자리에다 우리의 마음을 둔다면 우리의 행위인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청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도덕률입니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우주의 도리요,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리는 본래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말하는 언어나, 행동하는 몸짓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 곧 우주의 천연자연(天然自然)한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도 인간성의 실존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제가 가장 절실한 근본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깨닫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는 인간성을 개발하는선구자 입니다. 현대사회의 선구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칠전팔기로 즉시 다시 일어나서 나약한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땅에 넘어지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바로 일어나서 한사코 법성(法性)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붙이고 미망의 그물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 스승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나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이와 같이 생명의 고향인 본체로 돌아가는 그 행위가 가장 수승한 행위요, 가장 진정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된 몽상만 떠나면 모든 것이 한결같이 제법(諸法)이 공(空)이요 5온(五蘊)이 개공(皆空)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고 여러 가지 번뇌가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참구하는 공덕보다 더 수승한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영양분을 많이 섭취합니다만 그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훌륭한 영양분, 가장 완벽한 보약은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에다가 마음을 두고 바로 생활한다면 웬만한 문제들은 풀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가까울 수록 더 잘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무슨 병이나 다 근본은 무명에서 오는 것이며 법성 자리에는 본래 죽음도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안 먹어도 단백질을 별도로 안 취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약해서 뒤뚱거리고 넘어지기가 쉽지만 넘어지면 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길은 공명정대한 우주의 공정한 길입니다. 사실은 최상의 안락행(安樂行)입니다. 수행자들이 가는 길은 수 많은 성현(聖賢)들이 헤치고 다져놓은 탄탄하고 활짝 트인 해탈의 대도입니다.

전도된 몽상만 떠나 버리면 훤히 트인 마음으로 영생(永生)의 낙토(樂土)를 지향하여 환희용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눈도 열려 버리면 웬만한 병은 침범을 못합니다. 그래서 한없이 틔어 있고 다만 비어 있지 않는 자리, 무량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 이 자리를 생각하고 그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는 생활보다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불경에도 아가타약을 말합니다. 아가타약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부처님 명호나 화두나, 또는 주문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법은 다 한결같이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의 아가타약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요 일체의 존재가 바로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또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 호념(護念)하는 것입니다. 다같은 부처이므로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상통하고 감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자기 문중(門中)에 집착하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것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어두워지고 그지없이 옹색해 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틔어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없는 마음인 것을 구태여 지어서 ‘나’에 집착하고 법에 집착한다면 공부나 다른 사람한테나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되며 그것이 또한 우주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아무렇게나 방만(放漫)하게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에 대한 집착을 털고 나에 대한 집착을 털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해탈을 지향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번뇌 해탈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첨단 과학에도 뒤지지 않고 우리가 5욕의 수렁에서 헤매는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진정한 보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과거 전생에 두고두고 공덕을 쌓아서 금생에 영광스러운 법의를 입었습니다. 우리들의 무상(無常)한 금생 인연이 몇 차례나 다시 만나게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내생에 가서도 꼭 우리는 수행자가 되어서 피차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몇 만 생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사코 중생 제도를 위해서 반드시 고통 많은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때마다 출가하여 성취하고 본래 없는 무명 다 여의고, 본래 없는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게 할 것입니다. .
만법은 유식이라 모든 존재가 오직 식(識) 곧,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동물도 유정(有情)·무정(無情)도 모두가 오직 식(識) 곧 마음입니다. 식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만법유식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역시 식(識) 덩어리요, 마음 덩어리요, 산도 태양도 별도 식 덩어리요, 우리 지구도 바로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는 바로 그대로 지장보살 입니다. 또는 태양은 바로 그대로 관세음보살이요, 달은 대세지보살 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도리인 반야바라밀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여태 반야에 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도 하고 검토해 왔습니다.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 도리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고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현상계는 사실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비어 있어서 허무한 것이나, 모든 허망한 존재의 근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한 공덕을 갖추고 우주에 충만해 있는 바로 생명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실상(實相)의 도리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가 있으면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됩니다. 반야는 어느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전도된 몽상만 여의어 버리면 바로 반야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또는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또는 어떤 행동이나 때묻은 유루행(有漏行) 밖에는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이 보고 느끼는 일체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며, 범부인 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전도된 몽상입니다. 전도된 몽상을 끊어 버리지 않고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이런 수도의 방편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며, 관법(觀法)이요, 주문(呪文)이며 계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아직 반야의 도리를 증명은 못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바른 이해가 있어야 수행이 바로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인 자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俉後修)(먼저 깨치고 뒤에 수행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相)을 여의면서 체(體)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조(思潮)는 여러 갈래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하나의 도리, 하나의 근본 체성(體性)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 포괄적인 본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相)에서 체(體)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를 맞이하여 불교도 내 종파 네 종파의 편견에서 벗어나 불법의 근본이자 우주의 법칙인 반야바라밀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한 때 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러가지 방편이 있는 것인데 우주 자체가 무량무변한 진여불성이므로 불성을 깨닫는 대도(大道)에는 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무엇이 조주입니까’하고 법을 물으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라’ 진실한 조주는 어느 한 문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참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위대한 길이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마음만 사무치면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수도정진하는 과정에서 물(水) 보고 깨닫고 불(火)보고 깨닫고 달(月)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체(體)를 여의지 않고 용(用)을 나투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수행자의 자세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닫고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도 모두가 체에서 용으로 화현(化現)되었다가 다시 체로 돌아갑니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입니다. 현상적인 용(用)이란 본래 본체에 입각해서 용(用)을 나투어야 온전한 바른 통찰과 올바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본체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을 여윈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무소유의 경계는 일체만유 그대로 진여법성의 경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미망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자리에다 우리의 마음을 둔다면 우리의 행위인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청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도덕률입니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우주의 도리요,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리는 본래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말하는 언어나, 행동하는 몸짓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 곧 우주의 천연자연(天然自然)한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도 인간성의 실존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제가 가장 절실한 근본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깨닫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는 인간성을 개발하는선구자 입니다. 현대사회의 선구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칠전팔기로 즉시 다시 일어나서 나약한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땅에 넘어지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바로 일어나서 한사코 법성(法性)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붙이고 미망의 그물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 스승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나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이와 같이 생명의 고향인 본체로 돌아가는 그 행위가 가장 수승한 행위요, 가장 진정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된 몽상만 떠나면 모든 것이 한결같이 제법(諸法)이 공(空)이요 5온(五蘊)이 개공(皆空)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고 여러 가지 번뇌가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참구하는 공덕보다 더 수승한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영양분을 많이 섭취합니다만 그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훌륭한 영양분, 가장 완벽한 보약은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에다가 마음을 두고 바로 생활한다면 웬만한 문제들은 풀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가까울 수록 더 잘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무슨 병이나 다 근본은 무명에서 오는 것이며 법성 자리에는 본래 죽음도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안 먹어도 단백질을 별도로 안 취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약해서 뒤뚱거리고 넘어지기가 쉽지만 넘어지면 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길은 공명정대한 우주의 공정한 길입니다. 사실은 최상의 안락행(安樂行)입니다. 수행자들이 가는 길은 수 많은 성현(聖賢)들이 헤치고 다져놓은 탄탄하고 활짝 트인 해탈의 대도입니다.

전도된 몽상만 떠나 버리면 훤히 트인 마음으로 영생(永生)의 낙토(樂土)를 지향하여 환희용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눈도 열려 버리면 웬만한 병은 침범을 못합니다. 그래서 한없이 틔어 있고 다만 비어 있지 않는 자리, 무량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 이 자리를 생각하고 그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는 생활보다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불경에도 아가타약을 말합니다. 아가타약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부처님 명호나 화두나, 또는 주문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법은 다 한결같이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의 아가타약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요 일체의 존재가 바로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또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 호념(護念)하는 것입니다. 다같은 부처이므로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상통하고 감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자기 문중(門中)에 집착하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것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어두워지고 그지없이 옹색해 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틔어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없는 마음인 것을 구태여 지어서 ‘나’에 집착하고 법에 집착한다면 공부나 다른 사람한테나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되며 그것이 또한 우주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아무렇게나 방만(放漫)하게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에 대한 집착을 털고 나에 대한 집착을 털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해탈을 지향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번뇌 해탈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첨단 과학에도 뒤지지 않고 우리가 5욕의 수렁에서 헤매는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진정한 보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과거 전생에 두고두고 공덕을 쌓아서 금생에 영광스러운 법의를 입었습니다. 우리들의 무상(無常)한 금생 인연이 몇 차례나 다시 만나게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내생에 가서도 꼭 우리는 수행자가 되어서 피차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몇 만 생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사코 중생 제도를 위해서 반드시 고통 많은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때마다 출가하여 성취하고 본래 없는 무명 다 여의고, 본래 없는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게 할 것입니다. 참고 부다피아

조회수 : 597 , 추천 : 3 , 작성일 : 2003-10-17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