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의 법문,  뜻 깊은 좋은 말씀  깨침의 소리...

사행관이란-탄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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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배교수와의 대담 - 탄허스님

 

스님의 말씀 
사행관이란
첫째 보원행(報怨行)
둘째 수연행(隨緣行)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
넷째 칭법행(稱法行)이지요.

[달마스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달마선사가 내세운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대해서 개탄하신다.]
달마대사가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 것이
그 당시의 병은 조금 고쳐 주었지만 후세에 큰 화근(禍根)을 뿌려준 것입니다.

왜 화근이냐 하면,
달마조사가 불립문자라 해서 요즈음 무식한 수좌들은 흔히 문자가 쓸데없다고들 하지요.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이 하나도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불립문자라는 말이 문자가 쓸데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육조(六祖) 스님의 말씀을 들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육조 스님도 달마 스님의 전법제자(傳法弟子)인데 그분이 제자들에게 무어라고 하셨느냐 하면 “너희들이 달마의 말을 빌어 걸핏하면 문자가 필요없다고 하는데, 스스로 자기 미(迷)한 것은 옳거니와 어찌 부처님의 경전까지 비방하는가. 이런 견해는 그릇된 것이니 마땅히 당장 고쳐라” 하셨습니다.
달마대사의 말씀이 당시 광통율사(廣通律師)나 보리유지(菩提維持) 등 교리에만 집착하는 자들의 병을 고쳐 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이제 와서는 다시 병이 되어 버렸어요. 불립문자라는 말은 문자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일 뿐이지 쓸데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 가지 예로,
위산(潙山) 스님이 앙산(仰山) 스님에게 “너는 경(經)을 보아라” 하셨습니다.
앙산 스님이 “평소에 경을 보지 말라 하시더니 어찌 저에게는 경을 보라 하십니까?” 하고 묻자 위산 스님이 “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제 할 일도 못하지만 너는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야 할 사람이야”라고 했습니다.
또 어느 날 위산스님이 경을 보고 있노라니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저희들에게는 경을 보지 말라고 하시더니 스님은 왜 경을 보십니까?” 했지요. 그래서 위산 스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눈가림하고 있는 거야.(只圖遮眼)” “저희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눈가림하는 게 아닙니까?” “너희들은 소가죽도 뚫는다(牛皮也透得)” 했습니다. 그만큼 집착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가르치는 방법들이 모두 다른데 말을 바로 보고 바로 듣는 사람은 그런 데 걸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말한 사행관에 대해서 설명하면
첫째, 보원행은 어떤 액난을 당해도, 어떤 고통을 당해도 이것이 과보(果報)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되지요. 중국 사람들은 칼을 맞고 죽을 때도 [합장을 하며] “천명(天命)”이라고 말합니다. 멀리 유교, 도교에서부터 싹터 온 사상이지요. 어떤 죽음을 당해도 그들은 천명이라 생각하고 편안히 눈을 감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액난(厄難)을 당해도 과보(果報)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히 갖는 것, 이것이 보원행입니다.

다음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입니다. 고통이란 원(願)이 많은 것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구할 바가 없다고 하면 그것이 가장 잘 구하는 것입니다. 도를 구하는 것은 구하는 바가 없는 구함이지요. 이에 반해 재(財). 색(色). (食). 명(命). 수(睡) 등 오욕(五慾)을 구하는 것은 구할 바가 없는 구함입니다. 이것이 가장 고통이 많은 것이지요.

그 다음이 수연행인가요?
수연행은 연(緣)을 따르는 행입니다. 연을 따른다 함은 굳이 회피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피하지 않고 연을 따라서 행하는데, 무슨 일이 닥쳤을 때 응작(應作). 불응작(不應作)을 관(觀)해서 응당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이기심이고, 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 역시 이기심의 결과입니다. 해서 안 될 일은 과감히 끊고 해야 할 일은 목숨을 바쳐서 하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라 할 수 있지요. 그와 같이 연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수연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칭법행은 법에 합한다는 뜻인데, 이 법은 사회적인 법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이는 진리에 합한다는 말로서 능(能)과 소(所)가 다 끊어진 것, 즉 내가 하는 바도 없고 할 바도 없어진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부연하면 위에서 말한 것의 마지막 회통이 칭법행인 것입니다. 이것이 달마의 사행관으로서, 이 사행(四行)을 통하여 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
오늘날 급선무는 민생고 문제인데, 사실 요즈음 국민소득이 얼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애매한 숫자지요. 왜냐하면 총 소득을 국민 숫자로 나누어 평균치를 냈다고는 하지만 사실 고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옛날 노나라 정승이 공자에서 걱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먹을 게 적어 걱정입니다”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적은 것은 걱정말고 공평하게 분배 못하는 것을 걱정하시오”라 했습니다. 이 말이 곧 한 사람만 소득이 높아서는 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춥고 배고픈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나라 정승이 또 물었어요. “우리나라에 도둑이 많아서 정치를 못 하겠습니다.” 공자가 답하기를 “자네가 욕심을 안 두면 백성은 상금을 주고 도둑질하래도 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민생고가 해결이 되고 나서야 문화니, 예술이니, 종교니 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스님의 말씀
글쎄올시다. 사회적으로 전 대중이 잘 산다는 것은 정치적 해결이 아니면 안 되고, 종교적인 면에서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면이지요. 그건 몇 사람에게 국한되는 말이지 전 국민에게 통하는 말이 아니지요. 가령 불교인 한 사람이 앉아서 이렇게 하자고 해도 여러 종교가 있으니 말을 들을 리가 없고, 또 한 종파라 하더라도 모두가 다 들어주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어떻게 보편적으로 두루 통할 수 있겠어요. 따라서 사회인 모두가 잘 산다는 문제는 아무래도 정치가의 문제이지 일부 종교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의 문제로 보면 어느 시대, 어느 국토든 국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성인이 말했죠. “산에 들어가서 자취를 아주 끊어 버리기는 쉽지만, 사회에 머물러 있으면서 행하는 자취가 없기는 어렵다. 인간으로 부려지는 것은 거짓되기 쉽지만, 천지로 부려지는 것은 거짓됨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종교인의 삶입니다.

 

출처 : 탄허스님 홈페이지 (www.tanheo.com)

 

 

조회수 : 3691 , 추천 : 10 , 작성일 : 2008-04-12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