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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의 정치에 대하여2 - 탄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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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의 정치에 대하여2 - 탄허스님


서양과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서양식 사고방식은 하나에서 만 가지를 연역하는 것이고
동양식 사고방식은 만 가지를 하나로 귀납시키는 것입니다.

영국인(英國人)은 아이를 키울 때
“너는 이 다음에 커서 일류기술자가 되어라.
기술자가 될 수 없다면 일류예술가가 되어라.
예술가가 될 수 없다면 일류종교가가 되어라”고 한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춘추(春秋)』에
“태상(太上)은 입덕(立德)하고
기차(其次)는 입언(立言)하고
기차(其次)는 입공(立功)이라” 합니다.
즉, 가장 잘난 사람은 종교인, 도덕가가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문화인, 예술가,
그 다음은 과학자, 기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서양 사람이 바라는 내용은 같지만 그 순서는 정반대이지요.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외본내말(外本內末)인 것입니다.
근본을 밖으로 내버리고 지말(枝末)을 안에 두는 것이지요.
따라서 총체적으로 볼 때 서양의 외본내말(外本內末)하는 사상은 현실과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동양의 일본만수 만수일본(一本萬殊 萬殊一本: 한 근본이 우주만유요, 우주만유가 한 근본이다.) 사상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극악질의 인간은 10% 뿐

인류 전체의 10%가 극선질(極善質)이라면
다음 10%는 극악질(極惡質)이며,
80%는 평민(平民)인 것입니다.
요순(堯舜) 때라고 전 백성이 다 선질(善質)은 아니었고,
걸주(桀紂) 때라고 모든 국민이 악질(惡質)은 아니었습니다.

단 최고의 영도자가 성인(聖人)일 때엔
거기에 수반된 10%의 극선질(極善質)이 등용되기 때문에
10%의 극악질(極惡質)이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이고,

최고의 영도자가 소인(小人)일 때엔
거기에 수반된10%의 극악질(極惡質)이 등용되기 때문에
10%의 극선질(極善質)은 모두 암혈(岩穴)에 숨고 마는 것이지요.
나머지 80%의 평민은 어느 시대건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에
“요순(堯舜)이 수천하이인(帥天下以仁)하신데
이민(而民)이 종지(從之)하고
걸주(桀紂)가 수천하이포(帥天下以暴)한데
이민(而民)이 종지(從之)하니
기소령(其所令)이 반기소호(反基所好)면
이민(而民)이 부종(不從)이라” 했습니다.

요순(堯舜)이 어진 정치를 베풀 때에 백성이 그를 쫓았다면
걸주(桀紂)가 사나운 정치를 베풀 때 백성이 쫓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그대로 따른 것은 영도자로서 백성에게 명령하는 바와
영도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와 배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순(堯舜)이 성인(聖人)으로 어진 행동을 하면서
반대로 백성에게 어질지 못한 행동을 하라하면 백성이 쫓지 않는 것이요,
걸주(桀紂)가 어질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반대로 백성에게 어진 행동을 하라하면 백성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평민이 정치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평민은 성인이 정치하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자기 몸이 독 속에 들어있으면서 독을 굴린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몸과 독이 같이 굴러가기 때문이지요.
독은 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를 굴리려면 한 국가의 뛰어난 사람이어야 하고,
온 천하를 굴리려면 천하에 뛰어난 사람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뛰어난 사람이란 삼대성인(三大聖人)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성인이라도 각각 주장하는 분야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요순(堯舜)이 천하를 다스리는 분이라면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는 천하 밖에서 노는 분인 것입니다.

『장자(莊子)』에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정권(政權)을 양여(讓與)하면서 하는 말이
“일월(日月)이 출의(出矣)어늘
이작화불식(而爝火不息)하니
기어광야(其於光也)에
불역난호(不亦難乎)며
시우강의(時雨降矣)어늘
이유침관(而猶浸灌)하니
기어택야(其於澤也)에
불역노호(不亦勞乎)잇가,
부자입이천하치(夫子立而天下治)어늘
이아유시지(而我猶尸之)하니
오자시결연(吾自視缺然)이라
청치천하(請致天下)하노이다” 하니

허유(許由)가 왈(曰)
“자치천하(子治天下)에
천하(天下)가 기이치야(旣已治也)어늘
이아유대자(而我猶代子)인덴
오장위명호(吾將爲名乎)아.
명자(名者)는 실지빈야(實之賓也)니
오장위빈호(吾將爲賓乎)아.
초료(鷦鷯)가 소어심림(巢於深林)에
불과일지(不過一枝)요
언서음하(堰鼠飮河)에
불과만복(不過滿腹)이라
귀휴호군(歸休乎君)이여
여무소용천하위(余無所用天下爲)니
포인(疱人)이 수불치포(雖不治泡)나
시축(尸祝)이 불월존조이대지의(不越尊俎而代之矣)니라”고 했습니다.

(즉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정권(政權)을 양여할 때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덕이 일월(日月)이라면
나의 도덕은 횃불이요.
선생님의 도덕이 때맞추어 내리는 비라면
나의 도덕은 가뭄에 물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선생님이 정치한다면
천하가 잘 다스려질텐데
내가 오히려 이 천하를 맡고 있으니
스스로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청(請)컨대 천하의 정권(政權)을 양여합니다” 하니까

허유(許由)가 답하는 말씀이
“자네가 천하를 다스림에
천하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
내가 오히려 자네를 대신한다면
내가 장차 명예를 위해서 하겠는가?
명예란 것은 실상(實相)에서 일어나는 객(客=虛妄한 것)이니
내가 장차 객(客)을 위하겠는가?
뱁새가 깊은 수풀에 깃들 때 나무 한 가지면 만족하고
산쥐가 하수(河水)의 물을 마시는데
그 배 하나 채우면 그만이다.
돌아가 쉴지어다.
군이여 나는 천하(天下)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니
푸줏간 주인이 푸줏간을 잘못 다스린다 해서
축문을 읽는 관리가 축문(祝文)을 읽다말고
제사상을 넘어 푸줏간 주인의 일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 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한 후 허유(許由)는 영천수(潁川水)에 가서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귀를 씻었습니다. 때마침 허유(許由)의 친구인 소부(巢父)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영천수(潁川水)에 왔다가 허유(許由)의 귀 씻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허유(許由)의 말이 요(堯) 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맡아달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어 귀를 씻는다고 하니 소부(巢父)도 소에게 이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고 소를 끌고 기산(岐山)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장자 사기(史記)”

 

유ㆍ선교는 현실에만 국한

 

이처럼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사상과 역량에 따라 소임(所任)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맹자(孟子)의 말씀에
“도선이 부족이위정(不足以爲政)”이라 했습니다.
한갓 착한 것만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를 비판하면 도(道= 根本)자리는 같으나 용법은 다릅니다. 불교는 공간적으로 현실세계만 기준한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허공 속에 무한한 세계가 들어있고
시간적으로는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를 포괄했기 때문에
그 용(用)이 현세계, 현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요.
개개인(個個人)이 스스로 자기의 인품(人品)을 완성하면 미래세(未來世)가 다하도록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자기와 같이 성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의 용(用)이 넓고 커 현실정치에 국한된 것이 아닌 데 반하여
유교(儒敎)와 선교(仙敎)는 용(用)이 현실정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유교(儒敎), 선교(仙敎)를 내성외왕지학(內聖外王之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성외왕지학(內聖外王之學)이란
자가(自家)에 덕(德)을 완성하여 정치로써 실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치하면 제일 큰 것으로 보지만
기실 현실이란 것은 몇 푼 어치도 안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허유(許由)가 귀를 씻은 역사가 우리 후학(後學)에게 수천 권의 저서를 남긴 것보다 위대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천(天)은 무언지천(無言之天)이요 성인(聖人)은 유언지천(有言之天)이므로 성인(聖人)은 어느 시대든지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고 남는 것을 덜어서 그 시대, 그 인류에게 이익을 끼칠 뿐인 것입니다.

소강절(邵康節)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시대의 조류를 황(皇)ㆍ제(帝)ㆍ왕(王)ㆍ패(霸)ㆍ이적(夷狄)ㆍ금수(禽獸)로 나누고
사업의 종류를 오종(五種)으로 얘기하기를,
오패(五霸)를 백세(百世)의 사업,
삼왕(三王)을 천세(千世)의 사업,
오제(五帝)를 만세(萬世)의 사업,
삼황(三皇)을 억세(億世)의 사업,
공자(孔子)를 불세(不世)의 사업이라 했습니다.

공자(孔子)의 사업은
계왕성(繼往聖) 개래학(開來學= 과거 성인(聖人)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자를 개시(開示)한다)하신 교육사업이므로 영원불멸의 사업이 된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정치를 못한 것은 그 시대로 보아 불행이지만 정치를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불세(不世)의 교육사업이 된 것입니다. 『장자(莊子)』도 역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출처 : 탄허스님 홈페이지 (www.tanheo.com)

 

 

조회수 : 3716 , 추천 : 26 , 작성일 : 2008-07-11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