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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원하면 自性드러내라(활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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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원하면 自性드러내라

심성이라는 것은 순서도 근거도 없이 자연히 밝아지는 지혜의 모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각자가 타고난 심성은 진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진리는 진리되, 무명(無明)에 가려진 불완전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두터운 무명이 그 성품을 덮고 있다 하더라도 장막을 걷어버리면 본래 성품을 드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언제든지 무명을 걷어내고 성품을 밝게 할 수 있어요. 성품은 무한(無限)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한’이란 두 글자를 바꾸어 말하면 진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심성이 단번에 밝아질 때 바로 그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밝음이라는 것은 범부의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리 마음에 의해서만 느끼거나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살고 있지만 물의 소중함을 미처 모르는 것 같이, 우리 중생 또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며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늘 이렇게 어리석음과 어두움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지요. 하지만 심성을 어떻게 갈고 닦느냐에 따라 깨달음이 되기도 하고 미혹이 되기도 합니다.

흔히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빈손으로 온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함입니까. 올 때 아무 것도 따라올 수도 없고 붙일 수도 없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올 때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옵니다. 어떻게 보면 천지 자연은 내 판단력의 부속일 따름입니다.
이 판단력에 따라 큰 대로 작은 대로, 결정하는 대로 자기 역량대로 사는 겁니다.
마음이 정해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지 자연이 우리 생각과 정신을 만들어 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한 생각이 자연법을 결정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볼 줄 아는 능력은 특출한 것이지만 수행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나를 버리면 본래 성품이 드러나고 내가 본래 불성을 가진 부처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쓸 줄 알면 한 번 부딪친 것은 두 번 부딪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의존할 필요가 없지요. 결국 스스로의 얄팍한 계산에 속지 않는 것이 마음을 정하는 시작인 것입니다.

마음을 정하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을 고(苦)에서 해방시키는 해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행복을 원한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하려면 자성을 찾아 밝게 드러내야 합니다. 마음도 밝아야 하고, 보고 듣는 것도 밝아야 합니다. 밝으면 시비할 것이 없겠지만, 밝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중생들의 삶에서 갖가지 시비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자신이 못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본자리인 마음이 확실하지 않고, 무명과 번뇌에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정해지면 노력하게 되고, 노력이 뒤따르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정하면 얼마든지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일에 마음을 정하고 머무르지 않고 실천한다면 그 안에 도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출가한 이후 오로지 참선수행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흔히들 선이라고 하면 밤나무에다 대나무를 접붙이 하는 것처럼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선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비세간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이를 위한 노력이 선의 시작입니다. 선의 요체는 대우주 자연 생명의 이치를 바로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이치는 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참선을 해도 눈이 뜨이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일념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앉아서 쓸데없는 망상으로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간절한 원력으로 ‘이뭣고’를 참구하세요. 그러면 시간도, 공간도, 형상도 모두 잊게 됩니다. 화두 일념이 흐르는 물과 같이 지속되면 천사람 만사람이 다 진리의 눈을 밝게 뜨게 됩니다.

밝아야 한다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타고난 심성을 단번에 밝게 비춰야겠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수행정진을 안할 수가 없어요. 나 자신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의지로 열심히 정진하다보면 몸이 따라서 좋은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인과의 도리도 알게 되고 선업을 짓게 됩니다. 마음에 중심이 딱 서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도 밝게 마련입니다.
천지 자연은 나와 상대로 이뤄져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상대를 이루고 있지요. 나와 상대가 단번에 밝게 되면 천지 생명이 생기기 이전의 경계(境界)에서, 나와 상대라는 분별이 없어지고 나와 상대라는 분별이 없어지면 천지 생명이 시작하기 이전 경계에 접목이 됩니다. 나와 상대라는 분별도 없고 서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를 밝아지는 것, 마음, 지혜라고 여러 단어로 얘기 합니다만 의미는 다 같은 겁니다. 심성이 밝아지도록 노력하세요. 마음이 밝아지면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게 돼요. 생멸의 인과법칙도 능히 뛰어넘고 그 지혜는 결코 줄어들거나 다함이 없습니다. 어느 생명이든지 가만히 관찰해보면 심성이 가려져 있을지라도 이미 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요.
한 생각을 돌이켜 마음의 문이 열리면 우주의 진리와 온갖 현상이 거기에 들어 있지요.

불자들은 ‘나무 아미타불’ 염불도 많이 하지요. ‘나무 아미타불’에는 밝게 하는 발원이 담겨있고, 밖으로는 장엄법계를 넓게 포용하는 원융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 아미타불’을 자성(自性)이란 말로 축약할 수 있어요. 자성을 갈고 닦으면 타고난 심성이 단번에 밝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천지자연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주인도 되며, 뒤처리하는 장본인도 되는 변화무쌍한 것이니, 열심히 정진해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생멸은 공(空)합니다. 또 실상은 상주(常住)합니다. 마음이 열렸을 때나 닫혔을 때나 그 모습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판단이 되는 것은, 어두웠는데 손바닥을 뒤집으면 밝아지고, 밝았는데 뒤집으면 다시 어두워 어두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은 밝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모든 밝은 것이 생겨나고 어둡고 밝은 것에 끄달리지 않으며, 원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본성은 시방삼세 제불중생을 영원한 지혜와 행복의 모체로 생겨난 것입니다. 자성 청정법신의 모체로서 천지 자연을 두루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심성이 밝으면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니므로 상대의 처지와 상황에 맞도록 실천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밖으로만 치닫지 말고 외부의 화려함이나 물질에만 마음을 두지 말고, 현상의 근본원인을 파들어가세요.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이 정해지면 자연스럽게 해결의 열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정해지면 번뇌망상이 공으로 귀결되어 버립니다. 마음이 규합하면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영원한 자유의 길을 알려드렸으니 그 길을 향해 열심히 걸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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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천자암 조실스님 이신 활안 스님의 법문을 올려 보았습니다.
참고-http://www.buddhanews.com
성불하세요 ...()...

조회수 : 646 , 추천 : 4 , 작성일 : 2003-10-26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