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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삶은 부처 마음자리가 이성과 감각을 지배하는 것 (서옹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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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삶은 부처 마음자리가 이성과 감각을 지배하는 것 -백양사 고불총림 서옹 큰스님
-과학문명은‘욕망’의 산물‘참사람’자각할때 모순해결-

이 지상의 중생이 무명에 허덕이고 있을 때 부처님은 영원불변의 진리와 참사람의 위대한 진리를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대자대비한 인간본성의 일깨우심이었고 어둠 속에 광명을 밝히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의 길을 성취하시고 일생을 바쳐 가르치신 분입니다. 생명을 가진 중생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면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 생로병사의 실상을 깨달으시고, 이를 초월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참사람으로서의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되풀이되며, 참사람의 본바탕인 동체대비를 증득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데서 무명의 행업이 거듭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참된 인간사회 실현은 가치있는 모든 일에 앞서서 부처님의 혜명을 받드는데 있으며, 이를 개인 생활에서, 집단과 국가 인류 사회에서 창조적으로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당면한 반인간적인 비극의 실상, 즉 분열과 갈등, 침략과 전쟁,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욕망과 모순의 극복을 우리가 참으로 서원한다면 생에의 집착, 사의 허무를 초극해야 합니다. 또한 이성과 반이성의 대립을 넘어서 참사람으로서 평등과 자유를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현대는 과학문명의 극대화로 이른바 생활의 과학화라는 성과를 획득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과학문명이라는 물질적 욕망의 산물인 기계와 조직의 노예화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진 과학문명사회에서는 인간소외의 비탄이 높아가고, 낙후 사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인간화의 팽배로 그 신음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과학문명은 이성적 세계로서 모든 문제의 해결에 냉철한 이성을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입장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이성적인 대립관계가 비례적으로 상승될 수 밖에 없으므로 과학문명의 내적 구조는 절대적인 이성이 지배하지 못하고 절대모순이 상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귀한 생명도 절대영생이 아니라, 생·노·병·사 라는 필연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절대모순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절대모순에 봉착한 이성적 인간이 그 밑바닥을 타파하여 생사가 없고 자유자재한 참사람을 자각할 때에 오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지금 세계는 그 이념상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평화와 자유를 지향하는 민주사회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사회는 일면 인간본위의 도덕적 가치가 존중되면서도 다양성 속의 무책임한 자기 발산과 나 하나만의 이기적인 사고, 나 하나만의 방종한 자유의 주장으로 내적 갈등과 분열을 보이기도 합니다. 평화와 자유의 실현은 인간의 본질적인 이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우리 불교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원융(圓融)정신에 입각한 불편불의(不偏不倚)한 대동적 사상이라야 합니다.
나 하나만의 자유는 방종입니다. 이웃과 사회, 국가와 전인류적인 차원의 자유와 결부될 때만이 참된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나친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고 부의 축적만을 꾀하지는 않습니까? 나 하나만의 안전과 복락만을 도모하는 자기 일변도의 모순은 없습니까? 전체가 파국에 직면할 때 나 하나의 부도, 안전과 복락도 결코 지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이며 탐욕적인 자기 모순을 대담하게 탈피, 참사람을 실현하려고 참회할 때 축복을 받게 됩니다.
참된 사람의 동체대비를 실현하여 남을 이롭게 할 때 자기도 이롭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사상을 모든 생활에서 실천합시다. ‘참 나’는 이웃과 일체이며, 국가사회와 일체이며, 전인류와 일체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평등하며 일체이기 때문에 총화가 언제나 오늘에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심적 구조상, 첫째 그 밑바닥에는 감각과 욕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각 욕망이 없어서는 또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적임과 동시에 만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한량없이 불안하게 허덕이게 되고 또한 욕망에 끄달리면 자기의 올바른 정신이 없게 되고, 그것의 노예가 돼서 참 자유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그 욕망으로 인하여 질서도 없고, 폭력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살고 이성을 각성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개방된 욕망으로 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산다고 하면 당연히 질서가 있고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며, 그 결과 이와같이 과학문명을 창조해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성이 옳다, 그르다, 참이다, 거짓이다, 이것을 가지고 학문도 연구하고 과학문명을 건설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인간이 구경적으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착하다, 악하다, 참이다, 거짓이다 이러한 대립분열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항상 불안하고 결국에는 절대절망·불안·절대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감각 위에 이성이 있고 이성을 개발해서 살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 인간이 원만하게 잘 살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 그 바탕에는 부처님 마음 종교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참으로 무아의 경지, 절대의 경지, 영원의 생명체에서 우리가 편안하고 즐겁게 서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도와서 어디든지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으므로 우리 인간 근본 바탕이 이 부처마음, 이것을 개발해서 살면 우리는 훌륭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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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명을 이룩한 동기가 첫째 ‘대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자. 대자연의 법칙을 연구해서 우리 인간이 이용하자’ 이러한 못된 것이 밑에 깔려 있습니다. 대자연을 정복하자는 것은 하나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문명 자체를 개발하는데 있어서는 이성으로 개발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욕망이 깔려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개발하고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과학문명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학문명으로만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욕망이 과학기술과 이성을 이용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원만한 인격자라고 하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부처 마음자리의 작용으로써 감각과 욕망이 작용해야 원만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는데 거꾸로 오늘날 과학문명은 욕망이 과학적 기술과 이성을 이용합니다. 산업사회라는 것은 모든 것을 경제적으로만 개발하고 건설하자는 것 아닙니까? 경제적이라는 것은 욕망이 아닙니까? 이와같이 오늘날 문명은 욕망으로만 살려고 하니까 서로서로 해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인심이 험악해져서, 이와같이 계속 과학문명을 욕망으로 악용한다고 하면 인류는 결국 파멸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올바른 삶이라고 하면 그 부처 마음자리가 이성을 지배하고 부처 마음자리가 감각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처 마음자리가 감각으로 작용해서 감각이 되는 인격이 원만한 인격인 동시에 과학문명도 부처 마음자리 바탕의 원리에서 새로 창조하여, 우리 인간이 서로서로 그 부처 마음자리에서 부처님과 같이 자기도 부처님인 동시에 일체 인류를 부처님으로 존경해서 서로 봉사하는 그러한 행복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은 더더욱 발전시켜야 하지만 과학문명만으로는 도저히 인류가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위기의 벽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이 과학문명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벽을 타개하는데는 훌륭한 종교의 근원적 원리가 밑바침 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오늘날은 이와 같은 과학 지성과 모순이 된다거나 절대 복종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저 중세기가 아닌 현실에서는 통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과학과 모순이 되는 종교를 절대 복종하고 절대 의지해서 타율적으로 복종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저 중세기로 돌아가자는 세계 역사의 역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과학문명을 밑받침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떠한 것이냐, 할 때에 과학문명과 그 이성과 모순이 안 되면서 과학문명을 초월해서 과학문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주적·자율적으로 역사를 창조하는 원리라야 이 과학문명의 막힌 벽을 타개해서 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우리 불교야말로 철학적이며 과학을 초월한 것으로 인간 속에서 자기 참모습을 개발한 종교인만큼 자주적·자율적·자유로이 살면서 어디든지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게 새 역사를 창조하는 원리가 우리 불법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과학문명을 밑받침하고 세계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불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믿는다거나 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그 신도들의 마음자세에 따라서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성적 가치를 말하자면, 자기 욕망을 해결하려고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 참으로 훌륭한 종교라고 할 수 없어요.

종교는 감성만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참이다, 거짓이다, 착하다, 악하다고 비판하는 이성적 가치까지도 초월한 근본원리라야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 역사적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어도 단순히 감성적 가치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옳은 불법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해결하는 데에 감성적 가치만으로는 해결이 안되고 오늘날의 모든 문제를 우리는 이성적 또는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인생 문제라든가 세계의 깊은 문제는 이성까지 초월한 부처 마음자리, 인간 우주의 근본 생명체를 깨닫지 아니하면 해결이 안됩니다. 그 참 모습이 말하자면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하자면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참다운 부처님이라고는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금강경에도 말씀하기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음성이나 형상으로 부처님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더욱 더 깊이 들어가서 그 부처 마음자리로 돌아가면 부처 마음자리는 전부 우주를 창조하고 형성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등상불을 모신 것이 아니라, 더 차원이 높은 진리 입장에서의 등상불은 오히려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도 초월한 것입니다. 또 우리의 일거일동은 이 불가사의한 법계의 모든 것을 다 창조해 내는 한량없는 공덕이 되는 것이니 조그마한 불사가 아니라 바로 무한의 부처 마음자리 작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화경에서 말씀하기를 ‘애들이 장난으로 흙덩이로 부처님을 조성한다거나 모래로 부처님 탑을 쌓는다거나 또는 법당에서 한번 합장한다거나 나무불 하더라도 이미 성불을 마쳤느니라’ 이와같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한량없는 공덕을 지어서 성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이미 성불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자리에 들어가면 우리는 한량없는 공덕을 벌써 지어있고 벌써 성불해 있어서 다 구제가 돼 있는 것이 인간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참모습 바탕에서 우리인류는 평등하고 또 둘이 아니고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자비심이 나와서 우리는 자비·화합 바탕에서 이 세상의 모든 분열·대립·알력을 해결하는 데 평화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유행하는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철학이 아닙니까.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역사라고 되어있는데 그와같은 사상과 행동으로 나가면 인류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류의 위기가 전쟁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사상 가지고는 인류의 파멸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서로의 대립을 화합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우리 민족도 평화통일 할 수가 있고 세계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이 인간상인 것이며, 인간의 참다운 실존이 바로 부처님이지 따로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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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고불총림 서옹 큰스님 법문입니다.
http://www.buddhapia.com/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회수 : 714 , 추천 : 1 , 작성일 : 2003-10-26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