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의 법문,  뜻 깊은 좋은 말씀  깨침의 소리...

부처란? (구산 큰스님(1909-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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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처 란?

구산 큰스님(1909-1983)

탱 천 주 지 물 단 장 ( 撑 天 柱 地 勿 短 長 )
만 법 총 생 야 무 궁 ( 萬 法 總 生 也 無 窮 )
장 부 대 의 수 능 각 ( 丈 夫 大 意 誰 能 覺 )
원 포 귀 범 재 월 명 ( 遠 浦 歸 帆 載 月 明 )

위로 하늘을 괴이고 아래로 땅을 버티었으나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온갖 법을 내건만 한계도 다함도 없다.
대장부의 뛰어난 뜻을 누가 바로 깨쳤는가 ?
먼 포구에 돌아가는 배가 달 밝은 것을 실었네.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데 있어서 신라와 고려 때의 고전(古典을 회고해 가면서 남의 말에 팔리지 아니하는 올바른 인간이 되어서 올바로 살아보자는 뜻에서 나는 처음으로 칠바라밀(七波羅蜜)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신라와 고려시대의 고전을 회고하자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신라, 고려때에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은 문명가요 문화민족 이였는데, 이조(李朝)에 이르러 배불정책(排佛政策)을 쓰면서 나라가 여지없이 망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체로 되어 있어서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지만 동물은 육체 본위로 생활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무시하고 육체 본위로 사는 것은 동식의 생활인 것입니다.
마음을 찾아 깨우치고 육체(肉體)·영체(靈體) 두 가지가 갖추어 졌을 때, 비로소 완전무결한 인격을 성취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한놈이 약한놈의 것을 빼앗아 먹는 약탈주의와 근사한 생활을 해온것이 이조 5백년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조 5백년 역사는 연구해 볼 가치도 없다해서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도 말살 당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마음을 무시하고 육체 본위로 환경에 사로 잡혀서 맹수가 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식으로 살아온 이조 5백년 역사-참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배불정책을 썼다는 것은 부처님을 배반했다기보다는 마음을 배반했다는 결론이 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우주의 대진리 입니다.
요새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진리는 불변이다, 부동이다,
이런 말을 두고 씁니다. 변하지도 않고 동(動)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는것도 몸뚱이가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이지 마음은 몸뚱이가 생길때 따라 생기지도 않고 죽을때 따라 죽지도 않습니다. 마음이란 영원한 진리인 까닭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不生不滅의 진리, 영원한 진리란 바로 우리의 마음이요, 따라서 마음을 찾아깨친 그 사람을 불(佛)이라 말합니다. 佛 이란 말은 각자(覺者)라는 소리입니다. 요새 세상에서 선각자라고 말하는데 정말 각자냐 하면 이름이 각자지 진짜 각자는 아닙니다. 진짜 각자라고 하면 마음을 깨친 사람이 정말 각자입니다.
20년전 서울에서 불교정화(佛敎淨化)를 할때 박사 두분이 절에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점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를 마시다가, "이 찻잔을 가지고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말 할 수가 있는데 이점에 대해서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박사들에게 물으니까 "아이고, 우리는 거기에 입도 못 뗍니다." 하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찻잔하나 가지고 우주의 성주괴공과 사람의 생로병사를 어떻게 해설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는 지·수·화·풍(地·水·火·風) 네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허공은 바람이고 허공안에 물이고, 물안에는 흙이고, 흙안에는 불입니다.

우주는 그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허공은 풍륜(風輪)이라 합니다. 물은 수륜(水輪),흙은 토륜(土輪), 흙속의 불은 화륜(火輪), 이렇게 4륜 소생 네가지 바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찻잔의 재료는 흙입니다. 이 흙을 물에 타서 빚습니다. 거기에다가 바람을 집어넣으니까 움푹하게 깊어집니다.
그것을 구워 놓으니까 단단한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도 지·수·화·풍의 네가지로 이루어 졌습니다. 몸은 흙의 기운, 피는 물기운, 숨쉬고 활동하는 것은 바람기운, 몸의 온기는 불입니다. 이 네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그루 나무가 자라나는 것도 그 나무가 땅에다 뿌리박고 거기서 수분을 섭치하고,태양을 받고, 바람을 받고, 이 네가지를 받아야 양생이 되지 네가지 중에서 한가지만 없어도 양생이 되지 않습니다. 썩어 버리고 죽어버립니다.
그러니 우리 몸뚱이나, 나무 하나 자라는 것이나, 지구나 우주 전체가 이 같은 하나의 원리를 바탕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면 그 같은 원리를 주재하는 주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보이는 것을 볼 줄 알고 들리는 것을 들을 줄 아는 그 {한 물건}인 것입니다.
뭐가 보고 뭐가 듣느냐 이겁니다. 눈이 보고 귀가 듣습니까? 만일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면 죽은 사람도 썩어 없어져 버리기 전까지는 눈이 있으니 볼 수 있으며 귀가 있으니 들을 수 있느냐 이겁니다. 시체가 보고들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고기로 된 눈이나 고기로 된 귀가 아닌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운전수,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 그놈이 보고 듣고 뭔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친 사람을 보고 진정한 각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절대자입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멋에 살건만
이 몸은 언젠가는 한줌 재가 아니리
묻노라, 주인공아 , 어느 것이 참된 나런고.

그러니 나란것에 대한 정의와 한계와 가치를 알아야 하는데, 나라는 정의는 마음이 나지, 몸뚱이가 나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밤에 잘 때 꿈을 꿉니다. 몸뚱이는 잠을 잔다고 코를 골면서 누워 있지만 마음은 자지를 않습니다. 만일 마음이 몸뚱이의 구속을 받아 가지고 꼼짝 못한다면
몸뚱이가 잠을 잘때 마음도 꼼짝 못하고 잠을 자야 됩니다. 하지만 마음은 몸의 구속을 9받지 않는 까닭에 몸뚱이는 잠을 자도 마음은 자지않고 산에도 가고 물에도 가고 친구를 만나 희로애락을 느끼는, 이와같은 작용을 합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세계가 이 세계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인가. 흔히 말하기를 조물주가 있어서 이 세계를 건설해 놨겠지 하고 말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나타난 세계입니다. 마음에 나타난 세계란 천상·인간·아수라·지옥·아귀·축생의 육도고해가 그것입니다. 천상이 어떻게 마음에 나타나느냐 하면 그만한 복(福)을 지으면 천상에 나게 됩니다. 불교 믿지 않고 기독교 믿지 않아도 복만 지으면 천상에 납니다.
그러나 천상에 나도 영원한 천당이 되었으면 좋을텐데 영원한 천당이 아닙니다.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천당입니다.
복을 지어서 천당에 떨어지는 까닭에 지은 복이 다하면 천당은 없어집니다. 천당이 없어지면 그 다음에 가는 곳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강하고 투쟁심이 강해서 남과 싸움질을 잘하는 사람은 아수라세계에 태어납니다.
아수라 세계는 호랑이나 사자나 코끼리 같은 맹수의 세계, 그것이 아수라에 속하는 세계입니다. 싸움질 잘하는 놈은 아수라세계에 태어납니다.

그 다음은 지옥인데 성내는 사람이 지옥에 태어납니다. 사람이 성을 내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붉어지는 이유는 심리 작용에 의해 심장의 피가 끓어오르니까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러다가 더 심하게 성이나면 얼굴이 노랗게 됩니다. 노랗게 되는 까닭은 피가 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성이 아주 극도로 나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물에서 끌고 들어가고 불에도 끌고 들어가고 너하고 나하고 죽으면 그만이지 이밖에 뭐 있느냐고 행동할때 얼굴이 새까맣게 타버립니다.
왜냐하면 심리작용에 의해 심장의 피가 끓다가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와 같이 성이 많은 사람이 죽으면 구렁이나 독사나 지네와 같은 독한 것이 되어서 독을 품고 있다가 상대를 물어 죽이는 악한 짓을 합니다. 그러니 성이 극도로 났을 때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다음은 아귀(餓鬼) 세계입니다.
복이 많아서 부귀영화하고 잘사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과거에 복을 짓지 못해서 곤고 한 사람이 일확천금해서 잘 살려고 국가야 흥하건 망하건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의 보물을 외국에 팔아먹든 지 혹은 도박을 해서 한꺼번에 많은 돈을 벌려고 한다든지 장사를 하는데 상업 도덕을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아니하고 백원짜리 물건을 속여서 천원이나 받아먹으려는 그런 허황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아귀 세계입니다.
아귀라고 하는 귀신은 몸은 태산같고 머리는 바위덩어리처럼 크고 배는 산골짜기 만큼 큽니다. 그런데 목구멍은 바늘처럼 작습니다.
어째서 그 큰 몸뚱이에 목구멍은 바늘처럼 작은고 하니 남에게 베풀어 준 것이 없어서 받아들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목구멍이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데다가 항상 허황된 마음을 품고 살았기 때문에 뱃속에는 울화, 홧병이 있어서 화가 올라옵니다.
아귀라는 귀신은 입에서 불을 토합니다. 빨간불을 토하면서 고함을 지릅니다.
요이 되지 못한 강철같은 것이 아귀에 속하는 짐승입니다.
강철이 지나간 곳은 가을도 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은 궁할 때이고, 가을은 오곡이 무르익어서 풍부한 때입니다. 그런데 강철이 지나가면 그 기운에 바람과 모래 자갈이 곡식을 휩슬어 가면서 농사를 전부 망쳐 버립니다. 때문에 곡식을 모두 망쳐버려 봄처럼 궁한 시기가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아귀세계에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다음은 축생세계(畜生世界)인데 어리석은 사람이 축생세게에 태어납니다.
옳은 줄 알면서 옳은 일을 하지 않고 그른 줄 알면서도 그른 일을 범하는 것을 어리석다하며,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축생세계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천상·인간·아수라·지옥·아귀·축생의 육도 고해는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그 세계가 하나하나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각자 마음을 깨치고 나면 육도 고해가 공(空)해져 버립니다.
이 세계가 바로 낙원입니다. 극락세계입니다. 과거불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불은 오지 않았고 현재불은 마음을 깨친 부처입니다.
그래서 참나(眞我)의 정의는 마음을 깨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산에도 가고 물에도 가고 친구를 만나 희로애락을 느낄때 어떤 것이 나인가 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꿈에 행동하는 놈이 나입니까?
송장감이 잠자는 것이지 마음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몸뚱이는 잠을 자도록 나두고 마음은 우주를 건설합니다. 꿈속에서도 세계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나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이 뭣고…. 이뭣고…' 하고 자꾸 생각하면 깨쳐집니다.
대아(大我),무아(無我),소아(小我) 또 대승경지(大乘境地),소승경지(小乘境地)등 이런 말들을 씁니다.

지구는 지·수·화·풍 四大로 이루어 졌고, 몸뚱이도 지·수·화·풍 四大로 이루어졌습니다.
요즈음 과학자들은 영(靈)의 세게, 물질의 세계, 이 두가지를 구분해서 씁니다. 흔히 물질 세계를 과학이라하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철학이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것이 과학이고 어떤 것이 철학인가를....
몸뚱이는 과학이며 한도가 있습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을 영원한 진리라고 하면 마음은 철학이고 몸뚱이는 과학입니다. 마음은 영의 세계이고 몸뚱이는 물질세계입니다.
종교라는 단어에서 종(宗)자는 마루종(宗)자입니다. 마루라는 말은 산마루, 집이라고 하면 당(堂)마루를 말합니다. 종교는 우주태초를 말하고 우주태초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의 세계, 공(空)이라는 것은 절대(絶對)로 통합니다. 상대가 끊어졌다, 절대다 이 말입니다. 절대라는 것은 진리가 하나라는 말입니다.
또 길 도(道)자로도 통합니다 .왜 도로 통하느냐고 하면 길이라고 하는 것은 천삼라지만상(天森羅地萬象) 전체가 이루어 졌을때 어느곳에 던지 통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도 이처럼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시장에 가서 살아있는 고동·소라·전복 등을 사다놓고 이것이 佛性이 있느냐 하면 불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삶아서 알맹이는 까먹어 버리고 껍질만 남았을 때도 불성이 있겠습니까?
진리를 불성이라 합니다. 부처 佛자는 깨달을 覺자이고 성품 性자는 우주의 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를 깨우친다해서 각성(覺醒),불성(佛性)은 같은 말입니다.
고동·전복·소라 등 산 것을 사다가 삶아서 알맹이는 까먹어 버렸으니까 이것들이 죽기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껍질에도 불성이 있느냐는 겁니다.
흔히들 죽었으니 껍질에 불성이 없다고 말들을 할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성(性)은 不增不感이며 不生不滅이니 나고 죽지도 아니하고 더하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나 축생이나, 미물, 곤충이나 부처님이나 모두 성품(性)자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은 절대 차이가 없고 평등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기불을 켜 놓았을때 그 불빛이 어떤 사람은 예쁘니 더 비춰주고 ,어떤 사람은 미우니까 덜 비춰주고, 또 꽃은 고우니 더 비춰주고, 똥은 더러우니 덜 비춰주는 경우가 있습니까?
불성이란 성의 자체는 이처럼 절대 평등합니다. 또 부증불감이니 더하고 덜하는 것이 없습니다.
생사가 없다 이말 입니다. 그러니 우리들 각자도 {나는 몸뚱이가 죽었다 태어났다 하는 것이지 내 마음은 영원한 진리다』라고 생각하고, 나는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죽을 때에도 이제는 내가 낡은 몸뚱이를 내 버리고 새 몸뚱이로 갈아 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태연하고 편하게 생긋이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생사가 없다는 것과 소라, 전복 껍질에도 불성은 그대로 전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를 투시해 보면 몸뚱이와 지구는 물질이고 마음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진리에서 물질의 세계를 투시해 볼 때 지구는 내 몸뚱이와 똑같다는 것이며 이 지구가 내 몸뚱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인구가 50억으로 추산된다고 하는데, 그 많은 인구가 과연 내 몸뚱이와 같느냐 틀리느냐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그 많은 인구도 내 몸뚱이와 똑같습니다.
이처럼 지구도 내 몸뚱이고 세계도 내 몸뚱이라면 전체가 다 내 몸뚱이입니다.
이것을 대아(大我)라고 합니다.
우주 전체가 모두 내몸뚱이 이므로 어느 부분을 선으로 그어서 이것은 나, 저것은 내가 아니라고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대아는 곧 무아입니다.
소아(小我)는 미(迷)한 육체, 그것만이 나 인줄 아는 사람, 또 재물권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재산이 몇십억, 몇백억이 있다 할지라도 곤궁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주 전체가 내 것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것은 모두 남의 것이고 내가 재물권을 가닌 작은 이것은 우주에 비교한다면 큰 소의 터럭 하나만 못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곤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소견으로 사는 사람은 천명이나 만명되는 사람 가운데에 있어도 고독합니다.
전체는 남이고 나는 오직 하나 뿐이니까 고독할 것이 뻔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경지에서 살겠습니까? 대아에서 살기를 원하지 소아에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승경지(大乘境地)란 마음을 깨쳤을 때에 나타나는 경지입니다.
소승경지(小乘境地)란 자기에게 국한해서 그 한계만 지키는 것을 소승경지라 합니다.
그러면 허공이 내 마음을 이탈하고 존재합니까? 내 마음이 허공을 이탈했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속에 허공이 내 마음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내 마음이 허공을 이탈했는가, 허공이 내 마음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을 말입니다.
허공이라고 긍정할 경우에는 마음에 존재하니까 긍정을 하는 것이지만 만일 마음을 이탈하고 허공이 존재한다고 하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른다 이말 입니다. 그러나 허공인줄 알았을 때에는 이미 허공이 마음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허공에 존재한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은 허공보다 더 큰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벌어집니까? 위축되어 들어갑니까? 저 허공은 내 마음에 들어 있으며 내 마음의 한계는 허공을 휩싸 안게 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마음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평가 할 수가 없으며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허공이 말을 듣고 허공이 몸속에 앉아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말이 안됩니다.
송광사 뒤의 조계산은 800 고지입니다. 주위는 아마 300리 남짓 될 것입니다. 그러면 높이가 800m에다가 그러면 높이가 800m에다가 주위가 300여리 되는 순금덩어리가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금덩이와 내 자신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지구 전체가 금덩이라 할지라도 내 자신과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금덩어리, 그것이 뭡니까?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금덩어리 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자신은 영원한 진리인데 어떻게 바꿔질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사람들이 자기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릅니다.
단돈 몇 만원에도 훌쩍 팔려 넘어가고 무슨 국장, 국회의원, 장관까지도 금전의 유혹에 뚝뚝 떨어져 나갑니다.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주 전체가 금덩어리라 하더라도 바꿔 줄 수가 없는 나의 가치를 안다면 어느 누가 몇천만원, 몇억원을 가져와서 어쩌고, 저쩌고 한들 그것에 팔려 넘어가겠습니까?
팔려 넘어 간다면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한계(限界)와 '나'라는 가치를 알고 살아야 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올바른 인간이 되어 올바로 살자 ,올바른 길을 걷자는 등의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입니다.
과연 어떤 인간이 올바른 인간인가? 어느길을 가야 올바른 길을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 속이지 않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살면 올바로 사는게 아니겠느냐, 혹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나 지키고 살면 올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말은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벌이라는 벌레는 왕벌 한마리가 수천, 수만 마리의 군사를 거느립니다. 그런데 그 왕벌 한마리가 죽어 버리면 그 통속의 벌들이 모두 죽어버립니다. 왕벌이 죽었으니 다른 벌통에 가서 의지해 살자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왕봉이 죽으면 그 벌통은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또 벌이 들락거리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의 문지기가 한두마리 나와 문을 지킬 때, 다른 벌이나 나비 같은 것이 꿀을 빼앗아 먹기 위해 들어가려 하면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절대로 들어가는 것을 용서치 않습니다. 이처럼 벌은 영역을 잘 지키고 삽니다.
까마귀는 새끼를 나아서 기르는 기간이 석달 입니다. 석달 동안 길러 놓으면 다 큰 새끼가 다시 석달 동안을 어미, 애비를 앉혀놓고 먹이를 물어다가 먹입니다. 그것을 반포(反哺)라 합니다. 도로 먹여 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보고 효조(孝鳥)라 합니다.
또 부부간에 화락(和樂)하라고 하는데, 장닭은 모이를 주워 먹다가 먹을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물었다 놓았다 하면서 꼭꼭꼭 소리를 내면 암탉이 쫓아와 그 모이를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닭에게는 인이 있습니다. 어질다는 말입니다.

부부간으로 살면서 화락하지 못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지 못한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기러기라는 새는 수십마리씩 떼를 지어 날아갈때 횡으로 일자로 날아가든지 하지 절대로 일반새처럼 헝클어져 아무렇게나 날아가지 않습니다.
앞에 날아가는 길잡이, 그놈은 반드시 갈대를 하나물고 가다가 허공에 그물이 쳐져 있거나 그물에 걸리면 {끽} 소리를 칩니다. 그러면 뒤에 오던 기러기는 뒤에 돌아 날아가서 모두 섭니다.
육지에서 모이를 찾아 먹을 때도 한 두 마리가 망을 보는 놈이 있습니다. 망을 보고 있다가 개나 짐승, 도는 포수같은 이상한 것이 나타나면 {끽}소리를 쳐서 모두 달아나게 합니다.
하나도 희생당하지 않습니다. 그와같이 기러기도 형제간의 우애가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체 두 가지가 합해서 인간입니다. 육체가 있고 영체가 없으면 시체이고, 육체가 없고 영체가 있으면 귀신인데, 육체와 영체 둘다 있으나 육체만 알고 영체는 모르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존재를 일러 중생이라 하는데 중생이란 모든 생명체를 말합니다. 허공에 날아다니는 새 날파리, 땅에기는 짐승, 물의 고기, 모래알처럼 작은 살아있는 전체가 생명체입니다. 심지어는 육안으로 볼수 없고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균같은 것, 그것도 동물입니다. 몸뚱이는 알고 마음은 알지 못하고 사는것은 동물식의 생활입니다.

중생의 세계라는 말은 동물세계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데 몸뚱이만 알고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과연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진리와 선악을 구별 할줄 알기 때문에 동물중에는 좀 고상(高尙)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동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동물이 아니라고 하려거든 마음이 어떻게 생겼노라고 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어떻게 생겼다고 분명히 밝힐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긍정한다면 만물의 영장이고 부정한다고 해서 만물의 영장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 깨쳤다면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지만 만일 진실하게 깨우치지 못했다면 남이 아무리 부처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괴심(慙愧心)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괴심이 없다면 나무나 돌멩이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육체본위로 환경에 사로 잡혀 사는 것은 자나깨나 꿈이요, 동물식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무엇보다 불교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불교 하면 꼭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당래 미륵존불이나, 극락 세계의 아미타불을 찾지만 그게 불교의 길인 것은 아닙니다.
아미타불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당래의 미륵존불도 동물세계의 생활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찾아 깨우쳐 부처가 되었고 또 될 뿐입니다.
마음을 찾아 깨친 그 사람을 일러 부처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과거불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불은 오지 않았고 현재불도 마음을 찾아 깨우친 사람입니다. 우리가 법문을 듣는 것도 마음을 깨쳐서 부처 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각자(覺者)가 되자는 것입니다.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가 구족한 것이 부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전륜성왕도 32상과 80종호를 구족 할 수 있습니다.
천상의 전륜성왕도 복이 많아서 32상과 80종호는 구족 할 수 있을지언정 마음을 깨친 부처는 아닙니다.

조회수 : 1063 , 추천 : 13 , 작성일 : 2003-10-26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