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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수행자의 마음(현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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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수행자의 마음
내용 : 우후정화연야발(雨後庭花連夜發)하야 청향산입효창신(淸香散入曉窓新)이라
봄이 오는 모습이 비온뒤 밤 정원에 꽃들이 밤을 이어 꾸준히도 피어나서 은은한 향기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니 아침에 그 정신이 싱그럽구나
화응유의향인소(花應有意向人笑)언만
우리가 바라보는 저 꽃은 무언가 의미가 있어 활짝 피어있는데
만원선승공도춘(滿院禪僧空度春)이로다.
방안 가득 앉아 있는 수행자들은 그 의미도 모르고 공연히 세월만 보내는구나.

지금 이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는 뭔가 의미를 찾기 위해서 이렇게 앉아 있는데, 활짝 피어있는 저 꽃이 전하려 하는 의미를 알고 있는가?
한 송이의 꽃이 전하는 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지나간 시간은 허송세월일 것이다는 의미이다.
봄을 이야기 하고있지만 실은 마음을 이야기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찾는 사람은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찾는다.’ 또 ‘자기자신을 닦는다.’ 하지만 정작은 자기자신과 멀어지는 행동들을 많이 하고있다.
일상생활에서 자기 자신을 찾고 닦는 길은 무엇일까?
과거의 수행자들은 산을 바라볼 때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만리강산(萬里江山)은 비로와(毘盧臥)’라 하여 끝없이 이어져 있는 저 산은 비로자나 부처님이 다리를 쭉 뻗고 누워계신 모습으로 보았으며, ‘백초두상(百草頭上)에 관음무(觀音舞)’ 잡초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에서 관세음 보살님의 자비로운 몸짖을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산이나 풀잎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평소 맘에 걸리던 사람 조차도 모두 보살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한 눈을 뜨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자리에 모인 것이리라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찾는 데에는 끊임없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물론 세상의 풍파를 해쳐나가는 데에는 인내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예전에 어느 수행자가 있었다.
그 수행자는 잎이 무성한 소나무 아래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다른 수행자가 모처에 뛰어난 성자가 있는데, 부처가 되는 시기를 알려 준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성자를 찾아가 부처되는 시기를 물었더니, 성자는 “내가 이 말을 하면 그대는 충격을 받아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듣고 싶은가?” 하고 묻자 수행자는 “이미 각오가 되어있으니 숨김없이 알려 주십시오.”하였다.
성자가 말하길 “그대가 앉아 수행하던 그 소나무의 잎이 얼마나 되더냐? 그대가 부처가 되는 시기는 그 소나무의 잎 한 개를 100년으로 계산했을 때 그 잎이 다 떨어질 때 이니라.” 하였다. 이 말은 들은 수행자는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는 고맙다며 인사를 하였다.
성자는 수행자가 충격을 받으리라 생각하였기에 놀라 물었다. “이 말을 듣고도 어찌하여 춤을 추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느냐?하고 묻자, 수행자는 “이 세상에 소나무가 많고 많은데, 오직 그 하나의 소나무 잎이 다 떨어질 때 까지 인내하고, 수행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성자는 오히려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과거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왔으리라, 지금까지 겪어왔던 시련이 10중 8이라고 볼 때 앞으로 다가올 2라는 시련이 견뎌온 8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겪어온 시련들에 의해서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음은 본래 어리고 늙음이 없다고 하였지만, 비유를 들자면 시련을 많이 겪을수록 사람이 시든다고 하는데,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시련을 겪을수록 점점 더 젊어 질 것이다.
산을 무심코 바라본다 던지, 베란다에 피어있는 꽃을 무심코 바라볼 때에 자기의 마음을 한번쯤 추스려본다면 다가올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흔들리는 풀잎에서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구지 관세음 보살님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기좌진상수(起坐鎭相隨) 어묵동거지(語默同居止)
섬호불상리(纖毫不相離) 여신영상사(如身影相似)
욕식불거처(欲識不去處)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
라는 말이 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란 밤이면 밤마다 내 마음의 부처를 안고서 잠을 자다가, 아침이 되면 내 마음의 부처와 함께 고요한 기운을 담고 아침을 맞이 한다는 뜻으로, 우리가 일상 생활속에서 잠들 때 내마음의 부처와 나의 육신이 하나되어 잠을 자고, 일어날 때에 도 잠깐 동안 ‘지난밤동안 흐트러지지 않고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짧은 시간의 여유조차 갖지 않고서 큰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기좌진상수(起坐鎭相隨) 어묵동거지(語默同居止)’는 일어나고, 앉고, 눕고, 걸어갈 때에 항상 내 마음은 나를 따라다니고, 내가 말을 할 때나 말을 하지 않을 때나 나의 마음은 나의 말을 내가 듣고, 가만히 있으면 고요히 있는 나를 확인한다는 뜻인데, 이러한 것이 생활에서 습관이 되어야 있어야 한다.
바쁜 현대인들은 항상 생활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느라 이러한 것을 생각할 여유를 찾지 못하는 듯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생각을 하던 못하던 내 마음은 한 순간도 떠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섬호불상리(纖毫不相離) 여신영상사(如身影相似)’ 나의 깨어있는 마음은 한번도 떠난적이 없는 것이 머리털 간격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으며, 마치 우리의 그림자 처럼 늘 따라다니고 있는데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할 뿐이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옆사람이나 가족을 한번 불러보라. 부르면 대답을 할 것인데, 그 대답을 듣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그 대답을 듣고있는 그 사람이 바로 나의 부처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한 참회를 하여야 한다. 자기 자신속의 깨어있는 부처가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참회를 하여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는 바로 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모습이다. 자신의 모습을 모셔두고 자비한 관세음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겠다는 서원을 세우면서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내가 석가모니가 되고 내가 관세음이 되는 순간이 그것인데 우리는 여기에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기둥을 하나 둘씩 세워 나가야 집이 만들어 질 터인데, 기둥도 세우지 않고서 집을 얻으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과연 우리는 관세음이나 석가모니를 염하면서 내마음의 부처가 나의 절을 받고 있는지? 내 마음의 부처가 나의 기도를 듣고 있는지를 생각 해 볼 일이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주 자신을 불러달라고 부탁하라. 그에 대한 대답을 잠시 왔다가는 육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대답을 하는지를 항상 확인 하여야 한다.
일상 생활속에서 자기 자신이 남과 부딫힐 때에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공부를 하여야 한다.
내가 저 사람보나는 우월다는 생각을 가질 때, 또는 어려운 일에 직면하였을 때에 자기자신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럴 때에는 자주 자기 자신을 불러보라. 그렇게 부르다 보면 그릇된 생각이 절로 없어지고, 그 사람을 또 다른 부처로 보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저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음은 작게 쓰면 바늘 귀만큼이나 작고 크게 쓰면 한없이 크다고 하는데, 일상 생활에서 보면 너무 작게 쓰고있는 듯 하다.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는 변하지 않는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미소나 혹은 울음 등 가지가지의 형태로 조금씩 그 부처님을 보여주면서 살고 있다. 그 보여주는 것을 과연 어떻게 진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가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은 복을 빌기 위함만은 아닐것이다.
불자들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 복을 빌때에 빼먹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이 복을 빌어서 무엇을 할것인지, 그 복을 받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부를 때에 항상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노력하는 불자가 되어야 한다.
부다 TV

조회수 : 969 , 추천 : 4 , 작성일 : 2003-10-26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