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의 법문,  뜻 깊은 좋은 말씀  깨침의 소리...

믿음 견고하면 단박에 깨달아 거두고 놓음 한결 같아라(종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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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견고하면 단박에 깨달아 거두고 놓음 한결 같아라”종성스님(임제선원 조실)

불교 이전의 인도 사상계의 양대 조류는 유리론적(唯理論的) 관념론과 요소론적(要素論的) 유물론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존재의 본질을 물질로 보는 유물사상과 오늘날 신본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서양의 종교사상을 다 포함하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그들의 논리에는 유일신의 인격적 섭리에서 전변 분화한 현상계가 명과 무명, 선과 악의 근원적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무기적 물질의 요소가 유기적 생명체의 정신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성도 갖고 있지요.

하지만 부처님이 깨달으신 삼계유심 심조만유(三界唯心 心造萬有:3계에는 마음 뿐이니, 마음이 일체 현상을 만든다)의 마음 도리에서는 모순과 불합리성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한량 없는 광명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허망함이 없고 영원히 변함이 없는 진여일심이라 하고 진여법계라고 하며 진여자성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의 근본목적은 일체법의 근본인 마음을 밝혀서 진여자성을 보는 명심견성(明心見性:마음을 밝혀
자성을 본다)에 있습니다. 때문에 본래 청정한 나의 자성을 보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성취하여 우주와 하나되는 일심(一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황본 단경>에서 육조 혜능스님께서는 “일체 만법이 모두 자기 마음에 있는데 어찌 자기 마음 가운데를 좇아서 단박에 진여본성을 보지 않는가? <보살계경>에 이르되 나의 본원자성이 청정하다고 하니,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모두 불도를 이루어 다시 본래 마음을 얻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화두선이라는 좋은 방편이 있습니다. 화두선은 불교의 공부법을 보다 구체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개발해 냈지요.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마음의 당체를 아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화두란 의심입니다. 화두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고,

나를 의심하는 것이고, 부처와 조사를 의심하는 것이며, 또한 법계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큰 의심이 큰 진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의심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이 다 풀리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선은 자기 주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화두 또한 자기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선이 어렵다며 안할려고 합니다. 절에서도 신도들이 선을 어려워 하니까 기도, 염불 같은 걸로 포교한다고 하는데, 어려우나 쉬우나 선은 해야 합니다.

자기 주체를 세우는 가르침을 뺀 불교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선은 누가 뭐래도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에요.

최근에 일부 학자들이 전거(典據)를 대라고 하는데, 선의 근원인 삼처전심(三處傳心)은 <선문경>에 나옵니다. 화두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삼라만상이 왜 마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학적, 철학적 바탕도 있어야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왜 근본이 마음인가’라는 원리를 안 뒤에 참선을 해야 해요.
성철선사께서 백일법문을 하셨는데, 모두 교학의 핵심인 중도(中道)를 말씀하셨습니다. 화엄, 천태, 화두 드는 법, 과학 등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수좌들로 하여금 선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백일법문을 하신 겁니다.

선 수행자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만행은 선가의 불문율이에요. 몽산선사께서는 반드시 견성하고 문자에도 밝은, 종설(宗說)에도 능통한 대종장(大宗匠)을 찾아 단련하여 법기를 이룰 것이요,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어요. 행해(行解)가 상응해야 함을 조사스님들이 역설하신 것입니다.

선은 바로 마음의 도리를 실제로 깨닫는 진리요, 활발발하게 살아서 행동하는 활선(活禪)입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나 관념에 떨어지면 그 순간 선은 이미 선이 아닙니다. 일부에서 선을 중국불교의 한 지류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부처님의 뜻을 가장 올곧게 이은 분들이 바로 조사 스님들입니다. 근래 우리나라의 가장 큰 선지식은 성철선사, 향곡선사, 서옹선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성철선사는 내외전에 두루 해박했어요. <선문정로(禪門正路)> <한국불교의 법맥>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펴내셨는데, 참선 수행자의 필독서로 꼽을만 합니다.

화두를 성성적적한 마음에다 두고서 나가되 정념과 망심이 끊어진 곳에 이르러서 홀연히 의심을 타파하면, 마치 깜깜한 밤중에 태양이 솟아 올라 환하게 비추듯이 자기의 본래면목이 드러나서 견성 정각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의 요체를 영가스님은 “성성적적은 옳고 어지러운 생각이 성성하면 그르다. 적적성성하면 옳고 깜깜한 공에 떨어져 고요한 것은 그르다.”<영가집>고 했습니다.

화두를 실참해 견성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습니다. 아무리 대오하여 지견이 열렸다 하더라도 잠자는 꿈속에서 경계에 맞닥뜨려 암흑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망상연기(妄想緣起), 생멸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는 꿈속에서나 깨어있을 때나 한결같이 막다른 경계를 넘어서야 견성임을 역대의 조사 스님들은 설하고 있습니다.

불자님들은 ‘불교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깊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선법문을 듣는 것은 즐기면서 ‘선법문은 어려워서 들어도 모른다’고 합니다. 제대로 알고 나면 어려움도 없고 쉬운 것도 없는 것이 불교이고 선인데, 그 어렵다는 생각에 발이 묶여 있습니다.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합니다. 듣는 사람마다 다 알면 모두 다 해탈 성불했겠지요. 그런데 모두 성불을 못하잖아요? 어렵고 모르는 가운데 그걸 알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것이 참도리입니다.

중국 영명(永明)선사가 저술한 <유심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듣고 믿지 않아도 부처의 종자를 맺을 인연을 갖는 것이고 배워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 복이 인천을 덮을 만하다. 성불하는 바른 인연을 버리지 않고 믿고 배워서 이루는 사람의 공덕을 어찌 능히 헤아릴 수 있으리.” 듣기만 해도 성불의 씨앗이 되고 배우기만 해도 그 복이 무량하다는데 공부해 볼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알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나아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자님들은 법문을 듣거나 책을 볼 때면 이 구절을 잘 기억해서 어렵다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정진하길 바랍니다.

권제중생조속귀의불법(勸諸衆生早速歸依佛法)
모든 중생이 조속히 불법에 귀의하기를 권하노라

절규세간인류중(絶叫世間人類衆) 영위급급지위생(營爲汲汲只爲生)
연이하사사문입(然而何事死門入) 도재이심신불성(都在爾心信不成)
온 세상 인류에게 간절히 외치노니
그대들 바쁘게 경영하는 것은 오직 살고자 함이로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는 문에 들어가니
이 모든 어리석음이 그대 마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네.

일야부침각각사(日夜浮沈刻刻死) 성전활로대개문(聖傳活路大開門)
폐지일어일심자(蔽之一語一心字) 이간공부수복번(易簡工夫手覆飜)
낮과 밤에 떴다 잠겼다 시시각각 죽어가니
부처님께서 전하신 살아나는 길엔 대문 활짝 열렸네.
천언만어 폐지하여 한 마디로 마음이니
쉽고 간단한 공부가 손 뒤집기 같네.

신견수증돈초오(信堅遂證頓超悟) 불멸장생안락궁(不滅長生安樂宮)
무진무궁삼세제(無盡無窮三世際) 일여수방영화통(一如收放永和通)
믿음만 견고하면 단박에 깨달음을 증득하니
죽지 않고 길이 사는 안락궁이 여기로세.
무궁무진토록 삼세의 시공 따라
거두고 놓음이 한결 같아 길이 평화 통하였네

조회수 : 759 , 추천 : 5 , 작성일 : 2003-10-26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