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의 법문,  뜻 깊은 좋은 말씀  깨침의 소리...

용서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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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법정스님)


온 천지가 지금 꽃과 잎입니다. 겨울동안 아무 표정도 없이 묵묵히 있던 나무들이 저렇게 활짝 잎을 펼치고 있지요. 살아 있는 생물들은 봄철이 오면 안으로 차곡차곡 챙겨 넣었던 생명력을 마음껏 뿜어냅니다. 보십시오. 나무마다 다른 빛깔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나무의 진짜 빛깔입니다.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거의 같은 초록은 동색으로 됩니다. 처음은 여린 빛깔들이었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기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세상에 어울려 살다보니 특성을 소멸되고 거의 비슷하게 닮아갑니다.

제가 겪은 경험인데, 꽃은 가까운 곳에서 볼 꽃과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꽃이 있어요. 매화나 수선화, 배꽃이나 제비꽃은 가까이에서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복사꽃이나 산벚꽃은 멀리 떨어져 보아야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복숭아꽃을 보게 되면, 이 나이에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또 그런 분위기에 반쯤 기대고 싶어집니다. 봄날 분홍 꽃은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도색영화니 도색잡지니, 빛깔에는 그런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복숭아꽃 빛깔이 좋아 거기에 홀려 가지고 한 가지 꺾어다가 꽂아볼까 하고 전지가위를 갖고 가까이 다가갔더니, 이건 아니올시다 예요. 멀리서 바라보니 그렇게 사람을 들뜨게 하던 꽃이 가까이에서 보니 그게 아니더라니까요. 복숭아꽃에게는 미안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사람에게 환상적이게 보이지만 바로 가까이서 대하면 그렇더라니까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 에서 대해야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 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수행자들은 바라보아야지 가까이 대하면 크게 실망할 수 있어요. 청정승가. 몇 년 전에 어떤 신도한테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저도 크게 깨우쳤습니다, 스님들 모이는 사무실에서 경전강의가 있어 그길 갔더래요. 스님들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서 도저히 가고 싶지 않더래요. 그 신도님이 "야, 도 닦기 전에 너 몸부터 닦아라"고, 속으로 얘기하고 말았답니다. 스님들께서 무심해서 입는 것 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일하다가 땀이 나도 잘 씻을 줄도 모르고, 반야심경에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고, 잘 씻지 않는다니까요. 어떤 스님들은 수염이 길어, 남이 보면 수행자답지 않게 보이는 수도 있지요. 수행자는 단정해야 되는데, 역겨워서 다가가고 싶지 않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옳은 말입니다.

꽃과 새 잎이 펼쳐지는 눈부신 신록 앞에서, 사람도 꽃과 나무처럼 철 따라 새롭게 맑고 투명하게 피어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제자가 스승 앞에서 이렇게 여쭙니다. "저가 평생을 두고 저가 행할 수 있는 한 마디 가르쳐주십시오." 스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니라." 용서란 남의 허물을 감싸주는 일입니다. 너그러운 관용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미덕 중에 가장 으뜸가는 미덕입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습니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꾸짖는다면 그 허물은 결코 고쳐지지 않습니다. 허물을 지적 받고 질책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요. 여기서 우리가 가려야 할 것은, 선의의 충고와 꾸짖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선의의 충고는 인간 형성에 유용해요.

그러나 함부로 흉을 보거나 꾸짖거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용서는 사람을 정화시킵니다. 순식간에 정화시킵니다. 용서는 사람과 이해통로를 열어줍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용서의 미덕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의 결점을 들추는 사람은 남이 지닌 미덕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해서 결점투성이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미덕도 있습니다. 결점만 보면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놓치게 됩니다. 결점을 보는 사람은 따뜻한 온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봄날 꽃과 잎이 눈부시게 피어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훈훈한 봄기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사월 말이나 오월 초순이 되어서야 진달래가 피었는데 요즈음 피어나고 있어요. 날씨가 따뜻하고 가무니깐 꽃잎이 서둘러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가을에 잎이 지고 만물이 시드는 것은 차디찬 서릿바람 때문입니다. 남의 허물이나 결점이 눈에 띨 때 그 시선을 돌려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는 그런 허물이나 결점은 없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중생계는 너나 나나 비슷한 속성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잘 아시는 유명한 고사가 있지요. 중국 초나라 장왕이 어느 날 밤 잔치를 벌여요. 군신들이 한창 질탕하게 마시고 노는데 갑자기 촛불이 꺼졌습니다. 이때 한 신하가 왕의 애첩에게 다가가서 입을 맞춥니다. 애첩은 깜짝 놀라 엉겁결에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떼어서 지금 어느 무뢰한 자가 무뢰한 짓을 해서 갓끈을 떼었습니다. 그놈을 엄히 벌하소서 하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때 왕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오늘 밤 이 자리에서 갓끈을 떼지 않는 사람은 벌을 내리겠다. 그래서 모두 갓끈을 뗍니다. 그러니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습니다. 현명한 군주이지요. 그후 2년이 지나서 초나라와 진나라가 싸우게 됩니다. 진나라가 막강하니 초나라가 위급하게 됩니다. 그때 한 장수가 나타나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성을 발휘해서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게 됩니다. 알고 보니 왕이 용서했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왕의 용서에 감복하여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왕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관용은 그렇습니다. 만약 그를 엄히 다스렸다면 초나라의 운명은 없어졌지요. 그때 관용을 베풀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했던 것입니다.

정의가 아닌 업을 짓게 되면 스스로 그 과보를 받게 됩니다.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건 말았건 상관 말라
다만 너 자신의 허물과 게으름을 보라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수행자가 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스승은 "네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언제 어디서나 나는 누구인가 물어라. 그리고 누구의 허물을 들추지 말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봄으로써 한눈 파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일단 지나간 일을 가지고 그걸 다시 들추시지 마십시오. 과거를 묻지 마세요. 그것은 아물려는 상처를 건드려서 덧나게 하는 것과 같아요. 일단 지나간 일은 전생사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허물과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걸 가지고 늘 되 내이고 추궁하고 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고 서로에게 아무런 이익이 안됩니다. 원한만 사게 되요. 그런 사람은 타인을 불행하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불행해집니다. 이것이 업의 메아리입니다.

친구사이이건 부모자식사이이건 또는 부부사이이건 이미 지나간 과거세를 꽃피우는 것은 누구에게든 이롭지 않습니다. 불행입니다.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됩니다. 본래부터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순간 원수질 업을 되풀이함으로써 마침내는 한 하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됩니다.

저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길 합니다. 한 가족사이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좋은 업을 지어 단란하게 잘 사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가족사이 갈등이 심해가지고 늘 분란이 있고 편하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단편만 갖고서 이해하기 어려운데 업의 흐름으로 보면 이전에 지었던 업의 찌꺼기가 남아가지고 파동이 일렁이고 있는 것입니다. 멀리 있으면 안되니까 그 집 자식이 되고, 그 집 아내가 되어 가지고 낱낱이 들쑤셔 놓는 것입니다. 다시, 이미 지나간 일은 전생의 일이기에 들추어내면 안됩니다. 남을 불행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불행해집니다.

옛날 사막지방에서 수도하던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일화를 모은 '사막금은집'이라고 있습니다. 거길 보면 수도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수도를 했는가 엿볼 수 있습니다. 한 수행자가 선배인 원로에게 묻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덮어두는 것은 옳은 일인가? 이때 원로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덮어주면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덮어주신다네 그리고 이웃의 잘못을 폭로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폭로하신다네.

용서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십니다.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불보살이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것은 일종의 업의 노름입니다. 업이란 무엇입니까. 몸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입으로 그와 같이 말하고, 속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이것이 업입니다. 업의 흐름(파동)은 한 생애로 끝나지 않습니다. 몸의 그림자가 따르듯이 늘 따라다녀요. 내가 살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무엇이 나를 따라오는가. 재산이고 명예고 다 사라지고 영혼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는 것은 내가 평소에 그렇게 살았던 찌꺼기(업)는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업은 한 생애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수도)을 하는 것은 업을 맑히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업의 바다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무수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윤회라고 합니다. 마치 수레바퀴 돌듯 육도 윤회하지요.

삶은 업으로 인해서 맺은 그 꼬투리입니다.  맺힌 것은 풀어야 합니다. 어디에 맺혀있으면 안 밖으로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거든요. 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투명해야지요. 무엇인가 꼬투리가 있어 맺히게 되면 서로가 불편합니다. 마음이 지켜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게 되면 이 세상을 떠납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있어요. 이런 사실을 안다면 살아있는 동안 맺힌 것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업의 끄나풀이 다음 생애로까지 이어집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싫건 좋건 죽음이 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현상입니다. 죽음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 1막의 끝이에요. 맺는 2막의 시작이니 죽음을 괴로운 것 두려운 것으로 생각지 마세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매듭을 짓는 것이지요. 이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고 두려워하는데 우리 영혼은 어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원래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늘 인연 따라 새로운 몸을 맡았다가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닙니까. 나무들이 죽는다고 해서 그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씨앗이 떨어져서 새로운 나무를 이루지요.

모든 살아있는 것은 그렇습니다. 죽음도 살아있는 모습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다음 새로운 삶을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평소 그런 생사관을 가진다면 순간순간 사는 것이 막막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순간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새롭게 챙겨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종점에서 용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한 세상 업의 놀음에서 풀려나야 되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식을 기르면서 자식의 허물을 끝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한 여성이 한 남성이 대지의 어머니 아버지가 됩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 서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내 처지에서 아니라 저쪽 처지에서 해야 됩니다. 자기 고집대로 사는 사람은 용서가 없습니다. 함께 살고 늘 이웃을 생각하고 저쪽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 용서 안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허물이 있기 때문에... 한 가정에서 티격태격 싸우는 것도 늘 한쪽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혼식에서 파뿌리가 되도록 어쩌구저쩌구... 50대 50으로 절반씩 양보하고 해야하는데 여자가 기가 세어 남자의 기를 죽인다거나 남자가 여자의 기를 폭삭 죽인다거나 이런 가정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가정이란 무엇입니까. 같은 뜻을 가지고 서로가 한 집안에서 모여 사는 것이 아닙니까.
지난 생을 통해서 한 가족으로 만났기 때문이지요. 설사 어떤 나쁜 인연으로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 만났다 하더라도 어느 한쪽에서 마음 활짝 열고 풀어버리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 뜻을 모르고 참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편의로 생각한다면 그 가정은 끝이 막막합니다. 지금 그런 가정이 한 두 집이 아니지 않습니까. 업의 놀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어서 내가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 서야지요. 용서는 내 입장이 아니고 저쪽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용서를 거쳐 저쪽 상처가 치유될 뿐 아니라 굳게 잠긴 이쪽 마음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일단 마음의 문이 열리면 그 문은 무엇이든지 드나들 수가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인간의 기량이 확장되고 그 사람의 그릇이 커집니다. 이것이 사람이 꽃피어나는 소식이고 인간이 성숙해 가는 소식입니다.

끝으로 당부의 말을 들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이 누군가 맺힌 것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들은 인연으로 인해서 다 풀어버리십시오. 자존심 챙길 것 없어요.
자존심 그것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한쪽은 져야 되요. 그러면 결국은 이기게 되요.

새 잎이 펼쳐지는 이 눈부신 이 계절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잠재된 좋은 기운이 새 잎처럼 펼쳐집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설사 내 안에 아무리 좋은 잠재력의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묵히고 맙니다. 잠들고 맙니다.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얼키고설킨 업의 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말은 이만 마치고 남은 이야기는 지금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는 나무한테 듣기 바랍니다.

츨처 - 길상사 (http://www.kilsangsa.or.kr/)

 

조회수 : 802 , 추천 : 7 , 작성일 : 2004-06-29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