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무상스님이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봉은사 포교실장 소임을 보게 되었다. 봉은사 포교실은 내가 소임을 맞기 전부터 불교대학을 개설하여 13기의 교육생을 졸업시켰고 졸업한 기수를 구역으로 묶어 구역별 법회와 경전반을 진행하고 있었다. 종무행정으로 새로이 포교실에서 실시할 것은 담임제로 기수별 책임 담임을 선정하도록 되어있었다. 처음으로 담임제를 시행하게 된 기수가 14기이며 포교실장인 내가 맞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일상 학교에서 하듯이 강의 시작 전 반가운 인사와 출석 체크를 하고 강의할 강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강의가 끝나면 종례에서 조심해서 돌아가시라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담임 역할을 했다. 처음 실행하는 것이니 만큼 기수별 담임들은 서로 간에 관심이 컸다.
그해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는 졸업한 기수별로는 커피와 각종 차, 감자전을 부치고 염주를 나누어 주는 것과 특별 행사로는 단체로 전 대중이 헌혈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전 대중의 헌혈을 추진하면서 몸무게 55kg 이하는 헌혈을 하지 않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포교실 헌혈 특별행사를 지지하던 한 스님은 55kg이 되지 않으면서도 극구 헌혈을 했다. 헌혈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b형 간염이라는 결과 통지가 왔다. 평소 스포츠를 좋아하는 스님이라 결과에 소임자들이 걱정을 하면서도 헌혈을 행한 덕이라면 좋은 일을 행한 결과라고 달래었다.
어느 날 은사스님이 전화를 하셨다. 상도동 약수암을 다녀가라는 것이다. 평소 일상에 전화를 하시지 않는 스님이시라 전화를 받은 즉시 찾아뵈었다. 스님은 “미국에 거주하는 김영한 보살과 친분이 깊은 보살로부터 대원각 인수를 하라는 권고가 있어 이를 수락하였으니 네가 그 일을 해야겠다.”라고 하셨다. 내가 “아니 원래 10년 전부터 법정스님께 기증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당시 법정스님께서는 ‘기증을 할 것이면 조건 없이 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야기는 싫다.’라고 하셔서 그런 상태로 지금까지 왔다는 말씀과 함께 지금 김영한 보살님이 많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러니 김영한 보살의 그 뜻을 받아서 늦기 전에 대원각을 인수하는 일을 나보고 하라고 하셨다.
김영한 보살은 용산 동부이촌동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처음 가보는 이름난 부잣집 방문이라 내심 어리둥절하였으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짓으로 소탈한 할머니로만 보였다. 김영한 보살님과 재산 관리인이 함께 자리했다. 재산의 주인 김영한 보살님은 절을 만들려는 작은 희망이 있었지만 재산 관리인은 모든 재산을 카이스트에 기증하자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은사스님께 어디까지 생각하십니까? 하였더니 “생각은 무슨 생각이냐, 하는데까지 욕심은 내지 말고 불국토가 되는데까지만 하라” 하셨다. 그러시기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법정스님께 말씀드려서 ‘안 한다는 말씀만 안 하시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은사스님께 말씀은 그렇게 드렸지만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재산 관리인이 곁에서 카이스트에 기증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김영한 보살님 연세가 80세 인지라 김영한 보살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참을 궁리한 끝에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사찰 등록을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찰 등록서류를 이것저것 살폈지만, 실질적으로 등록할 재산이 없어 사찰로 등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되지 않는 일이었다. 사찰 등록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찰 이름이 필요했다. 은사스님께 “사찰 이름을 뭐라고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기에 궁여지책으로 대원각 앞자리 대(大)자를 따고, 법정스님 앞자리인 법(法)자를 따서 대법사(大法寺)라 했다. 총무원에 들려 사설사암등록 서류를 가져다가 사찰명 대법사, 창건주 김영한, 회주 법정, 주지 현문으로 해서 급하게 서류 작성을 했다.
그 서류를 들고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을 찾았다. 총무원에는 총무국장 성혜스님이 있었다. 성혜스님은 승가대학을 같이 졸업한 동기이자, 내가 학교법인승가학원인 중앙승가대학에서 교학국장 소임을 볼 때, 학교법인승가학원 법인사무처에서 법인사무국장 소임을 맡아 승가대학교 김포 이전을 위한 일을 한 인연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총무원 총무국장으로 옮겨 소임을 보고 있었다. 행정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지라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좁은 휴게실에서 무작정 서류를 내밀었다. 그 서류를 보고 총무국장이 놀랬다. 첫 일성이 “아니 이것을 네가 어떻게?”였다. 대원각 주인이 대원각을 절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일찍이 소문이 왕성했던 일이라 그리 놀랠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 일을 들고 왔다는 것이 경이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조계종 큰스님이란 스님들이 이 일을 스쳐 지나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말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각 교단 종파에서 눈독을 들이지 않은 곳이 없었고, 뜬소문이라 할지라도 모처에서는 백지 수표를 내밀었다는 이야기로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곳도 있었다.
먼저 전후 사정 이야기와 서류상 부족한 부분을 더 이상 챙길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를 했다. 더불어 사찰 등록을 먼저 하고자 하는 이유는, 현재 재산 관리인이 카이스트 기증을 권장하고 있는 한편 보살님의 건강 악화로 불가불 한 일이 벌어졌을 때 일을 추진하는 우리로서는 기댈 의지처가 없다. 조계종으로 사찰 등록을 하므로 말미암아 조계종에 등록된 사찰이란 이름으로 차후 위급한 일이 벌어져 어떠한 불가능성의 일이 벌어지더라도 등을 기댈 곳이 있어 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그리고 누가 하든 불국토가 되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성혜스님이 서류를 챙겨 올라갔다.
일주일이 지났다. 사찰 등록증과 주지 임명장이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것이다. 속전속결에 나도 놀랬다. 성혜스님이 서류를 챙겨 부장스님과 원장스님께 직접 보고를 했다고 했다. 사찰 등록증에는 사명이 대법사(大法寺)로 되어 있었고, 주지 임명장에는 주지 현문(玄門)으로 되어 있었다. 내심 기쁘고 감사하기가 그지없었지만 감사 인사도 못했다. 고마움에 감사함을 표할 수 없어 불확실을 핑계 삼아 일이 잘 풀리면 보은하겠다고만 하고 왔다.
사찰 등록증과 주지 임명장을 은사스님께 갖다 드렸다. 늘 그러하듯이 아무 말씀 없으셨다. 이일은 퐁당 퐁당 이었다. 김영한 보살님은 건강이 좋아지면 미국에 가 계시고 건강이 나빠지면 한국에 돌아와서는 일이 왜 더디냐고 도리어 재촉을 했다. 하루는 동부이촌동 아파트를 찾아 갈 때에 은사스님은 맛있는 음식을 챙기고 나는 사설사암 등록 보고를 하면서 창건주로 기재했다고 했다. 김영한 보살님이 “아무것도 안 주었는데 어떻게 등록을 할 수 있으며 창건주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절을 만드시려고 한다면 먼저 조계종에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과 조계종 사설사암 등록법에 대해 설명을 해드렸다. 무엇보다 창건주 권한에 주지를 추천할 수 있고, 창건주가 추천한 주지가 재산 관리와 사찰 운영을 맡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자 종단에 누구 믿을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 왔다. 그래서 다음에 올 때는 종단 사람을 모시고 오겠다고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김영한 보살이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을 출판한 것도 알았다. 돌아와서 내 사랑 백석이란 책을 구입해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내 사랑 백석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야기임을 느꼈다.’ 가끔 운봉 법광스님이 전화를 해 지금 뭐 하느냐고 물으면 성북동 비둘기 보러 간다고 했다. 이후 이 일을 진행하기 위한 회동은 ‘성북동 비둘기 보러 간다’는 말로 암호가 되었다.
그날도 미국을 다녀온 뒤였다. 호출에 총무원 재무과장 무이거사와 함께 갔다. 무이 거사는 본시 송광사 보성 방장스님의 상좌였다. 그가 출가하여 동국대학에 입학하면서 동국대학을 다닐 적에 상도동 약수암에서 기거하였다. 그와 나는 사촌 사제지간으로 내가 사형이 된다. 즉 보성 방장스님과 현문스님이 구산스님의 한 제자로 보성 방장스님이 사형이 되신다는 이야기 이다. 그가 동국대를 졸업하고 어느 날 환속하여 조계종 총무원 재정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를 찾아 대원각 이야기를 하고 은사스님이 이 일을 추진 하시는 만큼 재산등록 관계의 일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흔쾌히 말하기를 “제가 상도동 약수암에서 동국대학교를 다녔지않습니까? 그때 사숙님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해 이 일을 돕겠습니다.” 했다.
동부이촌동 아파트에는 김영한 보살님과 은사스님, 무이거사, 재산 관리인, 그리고 내가 함께 있었다. 김영한 보살님의 질문은 주로 무이 거사를 행했다. 재산기증 방법, 기증에 따른 세금 처리, 기증 이후 재산관리 방법 등 이었으나, 무이거사는 총무원에서 일상으로 하던 일이라 의혹이 없어질 때까지 자세한 설명을 했다.
이후 얼마간은 김영한 보살님의 마지막 결심이 필요했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김영한 보살이 다시 자신의 아파트로 불렀다. 은사스님과 나, 무이거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마지막 결심을 하신 것이다. 재산 관리인이 기증 재산 목록과 등기 이전에 따른 서류를 챙겨 주기에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이 조심스럽게 살피고 챙겼다. 정말로 이 일을 끝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혹이 생길 정도였다. 모든 것을 챙기고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김영한 보살님이 뒷짐을 지시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사이었다. 뒷짐으로 감추었던 서류는 내보이시면서 내가 모든 재산 기증을 하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만들기 위해 남겨둔 땅문서이다. 이 땅을 주면 장학기금을 만들어 주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멍하니 있다가 서로 간에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얼마나 구상하시냐고 물어보았더니 20억 정도라 하셨다. 그 땅을 마저 기증해 주시라고 요청했다. 천억을 기증하시는데 김영한 보살님 이름으로 장학금 20억을 못 만든다는 생각은 예우가 아니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에 못 만들게 되면, 그때에는 땅을 되팔아서라도 만들 수 있다는 감이 들었다. 무이거사 또한 “그 땅에 고층 건물이라도 들어서면 수행 공간으로서의 사찰 역할은 어그러집니다.”라고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법사는 지금 시작하는 사찰로 기반이 안정되려면 10년에서 15년은 걸립니다. 그러니 그 시간만큼은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라고 도리어 우리 쪽 요구를 말씀드렸다. 내 말을 듣고 그러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추가 기증된 땅이 대원각 테니스장 부지이다. 곁에 있던 관리인이 말을 거들었다. “약속 서류를 받아 공증이라도 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관리인으로서 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김영한 보살님은 “스님들을 못 믿으면 누굴 믿느냐며 스님들의 말이 곧 법이다.” 하시면서 손사래를 쳤다.
재산 기증에 따른 재산등록은 모두 무이 거사가 했다. 성북구청과 세무서에서 불만이 심하다고도 했다. 무이 거사가 재산등록을 마치고 나에게 모든 것이 끝냈다고 해서 은사스님을 찾아 뵙고 ‘기자회견이라도 해서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지금 대원각은 전세를 주어서 일 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남아있으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운봉 법광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심 한가운데 살면서 신문도 안 보느냐고 길상사 기증 소식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는 것이다. 김영한 보살이 법정스님에게 대원각 7,000평을 무상기증하여 길상사로 만들었다는 경향신문 기사였다. 한 신문에 기사화 되니 모든 신문이 달아올랐다. 은사스님을 찾아뵙고 어찌된 까닭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불국토가 되었으면 되었지 않았느냐, 무이거사 수고비는 내가 따로 챙겨 주었다.” 하시기에 전후 사정이 있는 것으로만 느끼고 돌아오면서 ‘아니 그럼 내가 부탁하고 신세진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무어라 설명하지’ 하고 속으로 궁시랑거리고 말았다.
여담으로 침묵은 그렇게 흘러갔다. 99년 김영한 보살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통 크게 생각해 불국토가 되었으니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 관심과 관계를 접으면 되는 일이었다. 2000년 나는 컨테이너를 움막 삼아 가평으로 들어 왔다. 2001년 덕조스님이 법정스님이 보냈다면서 찾아왔다. 법정스님이 덕조스님을 보내면서 정안이가 성격이 남다르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 끝에 아니 일의 실마리도 묻지 않고, 개원 법회를 하고 축하연에는 아는 체도 초청도 안 하더니 이 시골에 웬일이냐고 깡 물었더니, 김영한 장학금조성에 따른 여타의 일에 대해 물으러 온 것이라 했다. 김영한 보살 이름으로 20억을 조성해 드리기로 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덕에 지금의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도 말해 주었다. 이 일은 훗날 한남합동법률사무소로부터 사실 신문을 받아 그 공증한 사본(2001년 10월 16일)이 나에게 있다.
덕조스님은 법정스님 책 한 권과 토굴 운영지원비로 돈 300만원을 내게 놓고 갔다. 이튿날 나는 길상사에 전화를 해서 ‘길상사는 많은 대중을 위하는 곳으로 실질적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혼자 사는 토굴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받기는 아직 이르니 훗날 길상사가 안정되면 그때 도와주십시오.’ 하고 불사 통장을 알려달라고 해 되돌려 주었다. 참으로 가치가 크신 분은 다른 이의 가치도 크게 봐주신다는 것을 이로 인해 배웠다. 일을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 청학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사무국 업무를 보면서 대원각 일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그가 대원각을 기증받아 법인을 설립하여 독자 운영체계를 하고자 했던 것인데 김영한 보살님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프랑스 길상사 개원에 정성을 다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법정스님이 입적에 드시기 전에 법정스님 상좌가 길상사 창건주를 계승한 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 될 일이라 했다. 사설사암 법에 의하면 창건주를 계승할 수 있지만, 창건주로부터 인수를 받아야 했다. 즉 길상사 창건주는 길상화(김영한) 보살님이시다. 법정스님께서 김영한 보살님이 창건한 절을 기증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법정스님이 창건주 계승을 이어받은 일은 세상에 없는 이야기이다. 창건주 김영한 보살님이 99년 입적하시므로 창건주를 넘기신 일이 없어 창건주 권한은 소멸되었고, 자연스럽게 김영한 보살님이 창건한 공찰이 된 것이다. 상좌스님은 은사스님이 기증받은 사찰이라 그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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