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봉은사 포교실장으로 소임을 맡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았다. 소임자 칠 직과 신도회 간부들이 모두 긴급 소집되었다. 회의실에 갔더니 ‘아셈(Asia Europe Meeting) 유치단’에서 아셈 유치에 대해 봉은사에 설명을 하고 여론을 들으려고 왔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모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설명회는 마쳤다. 그날 온 단체는 무역회관, 강남구청, 정부 아셈유치단 등이었다. 설명은 주로 아셈 유치단에서 주도를 했다. 나는 마당에 나와 헤어지는 길에 아셈 유치단에게 “무역회관에 아셈을 유치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드리는데 주변 주민들과 환경은 어떻게 배려를 할 것이냐.”고 한 가지를 물었다. 유치단 대답은 “이제부터 설명을 듣고 검토하여 반영할 것이다.”라는 것이었고, 그 말만 듣고 헤어졌다. 도경스님은 “국가가 하는 일에 반대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얼마나 생각하고 공감하게 하느냐가 문제이지 않느냐”고 했다.
96년 논의 과정에서 농성과 시위까지 나오게 되자 총무로 무여스님을 영입하기로 했다. 무여스님은 6.29 민주화 선언 이전 실천승가회와 대승불교승가회를 통해 민주화 운동과 불교 자주화 운동에 지대하게 참여한 스님이다. 무여스님이 총무로 일을 하면서 무역회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강남 구청에서 연좌 농성도 했다. 구호는 아셈 유치로 빌딩 숲을 이룰 것이며 이에 따라 봉은사는 일조 조건과 수행 기도 공간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까닭에서였다. 아셈 유치단에서도 봉은사 수행 공간을 다시 보기도 했다. 어느 날 아셈 유치단 가운데 처음 설명회에서 만난 한 분이 나에게 “스님이 왜 나서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맡은 소임자가 알아서 잘할 것이다.”라고 했다.
어느 날 최호정 거사가 이래서는 안 된다면 무상 주지스님에게 종무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론은 무역회관과 합의를 봤는데 터무니없는 일로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이후 소임자가 바뀌게 되었다. 나보고 총무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 봉은사 중대 사안에 대한 의결은 은연중 승가대학교 10기 출신들이 맡아 열정적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면 된다는 생각과 이미 합의를 본 상태이고 합의 사안을 흩트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난간을 뚫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루는 주지스님이 나를 불러 “총무를 맡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총무를 맡아 일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책임지고 일을 하고 결정을 해 오면 흩트려버리는데 누가 할 의욕을 내기나 하겠습니까.”라고 속 마음을 말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그런 일 없게 할 것이니 총무를 맡아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라”고 했다. 나는 “업무 집중을 위해 스포츠센터와 운봉빌딩 신축 반대 건을 분리해 아셈은 총무가 맡고, 스포츠센터는 교무가 맡고, 운봉빌딩 신축 반대 건은 재무가 맡는 것으로 업무를 분리해주시고 사무장을 영입해 달라”는 조건조건을 제시했다. 그렇게 하여 주지스님의 승낙 아래 소임이 바뀌었다. 무여스님이 포교실로 가고 교무에 허주스님 재무에 명궁스님, 포교실장이었던 내가 총무를 맡게 된 것이다. 전 총무 무여스님이 포교실 업무를 보면서 포기실장이라고 가끔씩 자조적 언어로 나에게 핍박을 줬다. 그러나 무여스님은 발이 넓고 인맥이 깊어 그에게 사무장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최연씨를 추천했다. 하지만 최연씨를 모시게 해달라고 요청한 지 몇 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라 무여스님에게 어찌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워 말을 안 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니 스님보고 감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이 필요해 부탁을 드린 것이고, 내가 감당하지 못하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면 된다”라고 하며 불러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구성된 봉은사 대표로 나와 최호정, 최연 사무장이 함께했다.
무상주지스님께 “얼마를 요구해야 합당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주차장 건설과 사하촌 정리 당우건설 등을 해서 200억을 얘기하시길래 내가 “아니 땅 한 평 수용당하는 것도 없는데 200억은 과한 것 같습니다. 또 주차장 건설은 누구와 해도 메리트가 있으니 제외하고 100억 정도까지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체적인 논리와 방안을 갖추어야 했다. 강남 구청 도시계획국장실에서 열린 첫 회의에서 무역회관 대표나 강남 구청 대표나 아셈유치단 대표들이 한결같이 합의를 본 사항인데 왜 다시 회의를 소집했느냐며 성토였다. 앞의 합의는 우리는 모르는 일이며 합의해서도 안 되는 일이며,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합의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강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셈유치로 무역회관만 우아하고 아름다우면 다 되는 것도 아니며 주변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만들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것으로 하고 헤어졌다.
두 번째 회의에 들어가서 나는 “아시아 유럽 정상들이 무역회관에서 회의만 하고 그냥 가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무역회관이나 호텔에서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주변에 존재하는 사하촌 판자집과 아셈을 유치함으로 신축빌딩이 늘어나고 신축빌딩의 크기만큼 교통 혼잡이 예상되는데 이에 따른 문제해결 방안과 대안이 없다. 또 호텔 신축 등으로 상하수도의 폭발적 수요와 처리에 따른 환경 문제에 대한 대안은 있느냐. 그리고 강남은 개발 도시 구역으로 신흥 오렌지족이 사는 곳이라는 인식에 역사적 전통이 메마른 문화와 예술 전통에 대해서는 낑깡족이라 하는데 이에 따른 대안은 어떻게 할 것이냐” 며 강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최연 사무장이 회의장을 나서면서 환상적이라고 까지 했다.
이후 진행되는 회의 때마다 조건은 반복 강조되었고, 어느 때에는 책상을 밀치고 나오고, 어느 때에는 언성을 높이고, 어느 때에는 그냥 뒤돌아 나오면 뒷일은 최호정 거사와 최연 사무장이 남은 몫을 했다. 때로는 봉은사 대중과 신도들이 공사장 입구를 막기도 했고, 때로는 강남 구청에 간다고 하거나, 무역회관 회장실을 점검한다고 하는 헛소문도 퍼트렸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해서는 우리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으며 급할것도 없다고 했다. 늦추고 늦어지는 것은 아셈 건축물이며, 더디고 늦어지는 것도 아셈 측이라고 어깃장을 부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공사장 입구를 하루만 막아도 공사비 100억은 근방 손해 볼 것이며 우리는 땡전 한 푼 안 받아도 된다.” 말로 우리의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논리에 흔들리고 생각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급한 것은 그들이였으며, 안정을 바라는 것도 그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봉은사에서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 한 평 사기 운동으로 사하촌 정리를 해 가고 있으며, 이 일이 조금 더딜 뿐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도 말했다.
봉은사 아래에는 약 30여 채가 넘는 집들이 있어 사하촌을 이루고 있었다. 사하촌은 본디 예로부터 절 일을 돕고 여타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 상호 의존 관계에 있었다. 70년대 정부에서 강남 개발을 한다고 하면서 봉은사 부지인 땅을 법당 앞마당까지 선을 그어 수용 명령을 내리고, 정부는 아주 작은 보상을 했다. 무역회관이 차지하고 있는 그 땅 역시 선불 과장 시험을 보던 역사적 자리이다. 이를 80년 초 영암스님이 주지를 맡으시면서 사하촌 당사자들과 합의를 거쳐 이유를 막론하고 집 한 채의 부지 값을 이주하는 당해 연도의 아파트 한 채 값을 지불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봉은사에서는 신도들의 성원과 원력으로 몇 채의 집을 인수 받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봉은사의 사하촌 인수 진행은 무역회관과 협상을 하는 데 적잖은 힘이 되었다
주위에서는 정부 최고의 협상가들인데 되겠느냐고도 했다. 나는 안 된들, 최고의 협상가들과 맞서 진들, 아니 무너진들 나에게는 덜어낼 것이 무엇이 있으며, 나에게 붙어있는 명성이 없기에 더욱 해 볼 만하다고 했다. 밥 한 끼, 차 한 잔도 개인적으로 함께하지 않았다. 최호정 거사가 최후 협상안을 들고 왔다. 현금 63억에 무역회관 주변 식재된 나무와 나무를 이식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포함한 4억을 더해 총괄 67억에 합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주지실로 향했다. 주지스님께 여차의 설명을 드리고 합의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무상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움은 남지만 그렇게 정리를 하자고 하셨다.
저녁이 되어 원해 부주지스님이 포교원에서 퇴근해 돌아왔다. 원해 부주지스님은 포교원 포교부장을 겸하고 있어 오전이면 포교원에 출근을 했다가 퇴근을 하면 봉은사로 돌아왔다. 봉은사 부주지로서의 알 권리가 있고 나는 총무로서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협상을 하면서 가끔은 보고도 하고 자문도 얻고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렵다고도 했던 터라 그날도 사심 없이 여타의 이야기를 하고 무역회관과 현금 63억과 고가(高價)나무 이설 식비 4억을 포함 67억에 합의를 보기로 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냥 그 자리에 앉지도 않고 드러눕더니 100억도 받을 수 있는데 하는 것이었다. 내심 나도 꼬라지가 났다. 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비꼬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러면 스님께서 다시 협상을 하십시오. 저도 총무 그만두겠습니다.”하고 나왔다. 최호정거사와 최연 사무장에게는 조금 기다리자고 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주지스님과 최호정거사와 최연 사무장에게 종무회의에 협상 결과를 대중에게 보고하고 협상 합의 날인을 하러 가자고 했다. 결과는 정해졌고 합의 인준 날짜만 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보는 무역회관 이사장실은 넓고 참으로 좋았다. 높은 빌딩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봉은사는 시골 작은 마을 부잣집 같았다. 한 잔의 차와 합의문 날인과 한 장의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그 누구도 수고했다는 말은 없었다. 봉은사 대중 신도 모두가 수고한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뒤돌아보면 당시 봉은사에 당우로는 법당과 법왕루(종무소) 선불장, 심검당, 운하당, 다래헌, 명부전, 북극보전, 판전, 충령각, 영산전, 천왕문, 진여문, 명성암이 있었다. 대중이 기숙할 수 있는 곳은 모두 가건물에 합판 집으로 겨울이면 코가 시렸다. 협상을 마무리하고 아셈유치를 위한 공사가 무난히 마무리되면 2차로 기업 화주를 할 생각이었다. 아셈유치로 인해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호텔과 쇼핑센터 무역회관 회의실 공사를 맡아 하는 만큼 봉은사를 한국 굴지의 사찰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전(殿) 당(堂)으로 굴지의 기업들에게 전 당을 짖게 하여 자신들의 기업이 지은 전 당이라는 명패를 붙여 홍보하게 하는 2차 작업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절 인연은 협상 마무리에 그쳤다. 협상 날인을 하고 한 달 만에 한국은 IMF에 경제 구제 요청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같이 일한 공로자들에게 배려를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잊지 않고 있었다. 원해스님이 주지가 되었을 때도 최호정 거사에 대해 공로패를 수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러한 일에는 팬덤을 떠나 그 공로를 인정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공을 인정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드러난 일이 있고 그 일을 칭찬하고 드러내 공로를 인정해 칭찬하면 다음 일을 하고자 할 때도 또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대중을 위하고 사찰을 위하고 그 사찰이 자신들의 원찰임을 분명하게 해 줄 것이라 나는 믿었다. 명진스님이 주지로 오고 진화스님 주지도 지났다. 과거는 지난 일에 불과 하는가 싶었다.
아셈과의 협상을 마친 지도 10년이 넘었다. 원명스님이 주지가 되었다. 원명스님은 호법부장을 지냈고 조계사 주지를 역임하고 봉은사 주지로 갔다. 호법부장을 역임할 때 자공스님과 몇 번의 만남이 있었다. 원명스님께 사정 전후의 이야기를 하고 최호정 거사에게 지난 일이지만 공로패를 수여해 줄 것을 말씀드렸다. 원명스님 또한 없는 일이 아니니 어려울 것도 없다고 했다. 최호정 거사에게 공로패가 수여 되었다. 한 생각 놓게 되었다. 한 생각 놓게 해 준 원명스님에게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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